#독자 여러분은 '이름'을 몇 개나 갖고 계시나요? 물려받은 성과 이름을 조합한 '성명'은 없는 분이 없으실 테고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도 하나쯤 있으실 테고요.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할 때 쓰는 '아이디'(ID)도 있고, 블로그'카페'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활동할 때 쓰는 '닉네임'도 있으시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이름에 목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흔히 나옵니다. 유교 경전인 '효경'(孝經)에 따르면 '이름을 후세에 드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름 명'(名)자가 들어가는 단어인 '명예'(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 '명성'(세상 널리 평판이 높은 이름), '명분'(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이유) 등에 자존심을 거는 한국 사람 기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죠.
여전히 '작명'(이름 짓기)이 중요한 세상입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이름에 개성과 즐거움도 녹여 넣는 시대가 됐습니다.
◆작명 '즐기는' 시대
다음은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일까? '티코 모아 벤츠' '마추픽추에서 리버풀까지' '팁 받은 것'. 얼핏 자동차, 세계여행, 웨이터(?)가 떠오르지만 공통점을 찾기란 쉽잖다. 정답은 통장 이름이다. '티코 모아 벤츠'는 푼돈으로 목돈 모으기를 재치 있게 표현한 통장, '마추픽추에서 리버풀까지'는 여행 경비 마련 통장, '팁 받은 것'은 말 그대로 고객에게 팁으로 받은 돈을 모으는 통장 이름이란다. 우리은행이 내놓은 '마이스타일' 적금 상품이다. 이외에도 고객이 통장 이름을 짓는 금융상품이 여러 은행에서 속속 출시되고 있다. 은행들은 "고객은 뚜렷한 목표로 재테크를 할 수 있고, 은행은 고객의 거래 특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회 곳곳에서 즐거운 작명이 유행하고 있다. 특징은 DIY(Do It Yourself), '스스로 짓기'다. 남이 지어주는 것에 익숙하던 영역을 점차 '셀프 작명'의 영역으로 바꾸고 있는 것.
우리 사회의 셀프 작명 소양이 개발된 대표적인 곳이 온라인 커뮤니티다. 네티즌들은 사회 이슈가 있을 때마다 뉴스보다 빠르고, 요약도 잘된 '촌철살인'의 작명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정치인 별명이 대표적이다. 이전에는 YS(김영삼), DJ(김대중) 등 언론에서 먼저 정치인에게 붙이던 것을 이젠 네티즌이 별명을 붙이면 언론이 '받아' 쓴다. 안상수 전 국회의원은 2010년 연평도 포격 피해 현장에서 불에 탄 보온병을 보고 "이게 포탄입니다"라고 외친 것이 언론 보도를 타 네티즌들로부터 '보온상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군 면제 사유가 '행방불명'이라는 이유로 '행불상수'라는 별명을 얻는 등 네티즌들의 짓궂은(?) 별명 짓기 시리즈가 이어졌다.
이외에도 밀어붙이기식 스타일로 '최틀러'(최+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은 최병렬 전 국회의원이나 강인한 이미지로 '추다르크'(추+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은 추미애 국회의원(민주통합당) 등 정치인의 성격이나 정치적 성향을 절묘하게 요약한다. 그러면서 대중들에게 비치는 정치인들의 공로와 과실이 그대로 별명에 함축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연예인 등 다른 유명인들의 별명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친다. 그러면서 무대나 시상식 레드카펫 등에서 실수로 넘어지면 이름 앞에 '꽈당'을 붙이고, 놀라운 특기나 능력을 선보이면 이름 뒤에 '신'(神)을 붙이는 것 등은 아예 별명 짓기 법칙이 됐을 정도다. 직장인 김동현(30'대구 수성구 만촌동) 씨는 "학창시절 별명 잘 지어주는 아이가 반마다 한두 명씩 꼭 있었다"며 "요즘 네티즌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해 코믹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별명을 짓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각종 '이름 공모'를 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과거 지자체나 공공기관은 사업'정책명이나 신축청사'공원 등의 이름을 '알아서' 지었다. 이름의 어감은 딱딱했고, 읽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시민들에게 작명의 재미는 물론 '참여'의 재미도 부여해 관심을 모으고 만족도도 높인다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올해 대구경북에서 시'도민들이 붙여준 이름을 살펴보면 대구 수성구 고산 청정미나리 브랜드 명칭인 '고산도래샘 미나리', 경남 거창군 공공자전거 사업 이름인 '그린씽' 등이 있다.
◆요즘 '팔리는' 이름은?
사람들은 작명을 그저 즐기고 있지만 골머리를 앓는 곳도 있다. 제품 이름으로 소비자를 그러모아 이윤을 남겨야 하는 기업들이다.
특히 장기 불황 분위기를 반영한 이런저런 작명 트렌드가 나오고 있다. 식품 업계에서는 직설적인, 일명 '돌직구' 작명이 유행이다. 소비자의 인지가 3초 만에 이뤄지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강렬한 제품 이름이 대세라는 것. 매운맛을 강조한 '불타는 매운 고추장', 성분과 용도를 표시한 '조개멸치 찌개 된장', 모양을 그대로 설명한 '동그란 두부' 등이다. 그러고 보면 조리 시간을 설명한 '3분 카레'나 조리 방법을 설명한 '비빔면' 등은 장수 브랜드가 된 이유 중 하나로 '간결하면서도 친절한 설명이 담긴 제품 이름'을 꼽을 수 있는 사례다.
반대로 출판계에서는 '불황에 긴 제목이 잘 팔린다'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로 교보문고의 올해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1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비롯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등 짧은 단어형이 아닌 긴 문장형 제목의 책들이 상위권을 많이 차지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현재 오피스텔 분양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작명법은 도시를 뜻하는 '시티'를 이름 뒤에 붙이거나 '도시철도 역명'을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이다. 오피스텔이 수익형 부동산으로 떠오르고 있는 까닭에 도심에 가깝고(시티), 교통이 편리한(도시철도 역명)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파트의 경우 쾌적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추세다. '파크'나 '센트럴'은 조경 공간 등 쾌적한 주거 환경을 강조한 이름이다.
채완 동덕여대 교수는 2004년 발표한 '아파트 이름의 사회적 의미'라는 논문에서 "아파트 상표명에 우리 시대 사회상이 나타난다"며 신분상승'과시욕구'부자열풍'웰빙바람 등의 요소를 꼽았다. 한 예로 조금 유행이 지난 아파트 이름인 타워'캐슬'팰리스 등은 왕족이나 귀족의 거주지라는 느낌을 준단다.
◆'성명' 짓기 세태 들여다보니…
세계 70억 인구 중 이름 없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각 문화권마다 엄준한 작명법이 전해져 내려온다. 요즘은 여기에 약간의 '유연함'을 가미하는 추세다.
성명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아 부모가 직접 아기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셀프 작명소가 최근 인터넷에 등장했다. 또 세계화 시대에 자녀의 영어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소도 유행이다. 부모들이 향후 유학을 보내거나 국제학교에 진학시킬 계획으로 자녀의 영어 이름을 마련한다는 것. '찰스' '윌리엄'처럼 귀족 이미지를 풍기는 이름이 인기지만 잘 모르고 서양에서 애완동물에게 주로 붙이는 이름을 선택하는 실수도 벌어진단다.
어찌 보면 사람 이름에 준하는데도 쉽고 자유롭게 붙이는 이름이 있다. '태명'이다. 강희숙 조선대 교수가 지난달 발표한 '태명의 실태 및 확산에 대한 사회언어학적 분석' 논문에 따르면 태명 짓기가 젊은 부모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조사대상 어린이집 유아의 76%가 태명을 갖고 있었다. 태명은 순수 고유어가 대부분으로 복덩이, 튼튼이, 똘똘이 등이 인기였다. 강 교수는 "부모들은 태아도 인격을 갖춘 생명체라는 생각으로 매일 이름을 불러주며 친밀감과 유대감 등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등록 이름 글자 수 제한을 완화하는 법안이 지난 8월 국회에 제출됐다. 새누리당 박성호 의원은 기존 성을 제외한 이름자를 6자 이상은 등록하지 못하던 것을 10자 이내로 늘리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 의원은 "작명 선택권은 기본적인 개인의 자유"라며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외국인 부모가 고국의 문화를 반영해 자녀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한 취지도 있다"고 말했다.
또 '이름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구 수성구 이재박 작명연구소의 이재박 원장은 "이름은 평생 '소리'로 불리며 자신의 타고난 천성을 긍정적으로 가꾸는 역할을 한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름이 성격을 좋게 바꾸고, 좋게 바뀐 성격 덕분에 좋은 운명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