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법

향이 좋은 아리비카 종의 커피원두를 고르고 갓 볶은 원두를 용기에 넣어 천천히 갈아 봅니다. 빠지직 부서지는 파열음 속에 기분 좋은 향기가 새어 나옵니다. 뜨거운 물에 가루를 넣고 저으며 신맛과 쓴맛 그리고 향기가 가장 좋은 조합을 이룰 때까지 잠시 기다려 봅니다. 최후의 쓴맛이 나오기 전 꾹 눌러 마시는 커피 한잔의 향이 입안을 오래 감돕니다.

한해가 가는 것이 정말 빠릅니다.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보는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보자마자 격의 없는 말투가 튀어나올 정도로 불과 몇 해가 지난 것 같았는데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한꺼번에 지나가다니요. 탄식만 나올 따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율과 평등을 약속하는 시간은 한 치의 변명도 용서가 안 되기에 너그러움과 잔인함의 양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인 듯합니다.

작년 중반쯤이었습니다. 과학관 일을 시작한 지 한 3년쯤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던 어느 날, 뒤를 돌아다보니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었습니다. 2년이 채 안 된 지금도 작년 초반을 돌아볼 때면 4~5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현 상황에서 시간은 분명히 느리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30년이 3년 같고 때론 3개월이 3년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에 대한 감각,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에서 일까요.

저의 경우는 아마도 3개월간 새로이 접한 경험의 총량이 과거 3년 동안 살면서 경험하였을 양과 맞먹었기에 생체시계가 3개월을 3년으로 생각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내부에서 체감하는 시간은 늘어난 반면 외부에서의 시간은 그대로였기에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생각됩니다.

기왕이면 시간은 빠르게 가는 것보다는 느리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리적으로 그럴 수 없다면 심리적으로라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시간을 절약한 느낌이 드니까요.

새롭고 신기한 경험으로 가득 차던, 생일이나 소풍이 다가오기를 학수고대 하던 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는 것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이 지나가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맥박과 호흡이 느려지는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자극이 없어져서라고 합니다. 삶은 점점 규칙적이 되어가고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의 반복이고 미래는 예상 되었던 대로 흘러가고.

'버킷 리스트' 라는 영화에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60대의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삶은 고작 1년, 그들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만듭니다. 장엄한 광경 보기, 낯선 사람 도와주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무스탕과 셀비로 카레이싱 하기, 최고의 미녀와 키스하기, 영구문신 새기기, 스카이다이빙 하기, 로마'홍콩 여행가기, 피라미드, 타지마할 보기, 오토바이로 만리장성 질주하기, 세렝게티에서 호랑이 사냥하기.

평생 마음에만 있었지 실천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아주 짧은 시간에 하나씩 해나가는 그들에게 남아 있는 몇 개월은, 평생에 버금갈 만큼 느리게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근에 원두커피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커피가 일상화된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겠지만 카페인 때문에 인스턴트커피도 멀리하던 제게는 새로운 일입니다. 우연히 '커피는 과학이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이지요. 커피의 생육과 성분에 대한 정보, 그리고 커피의 좋은 향기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수해야만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원두의 종류와 맛을 추출하는 방법에 대한 즐거운 고민으로 당분간은 가슴이 설렐 것 같습니다.

쓴맛과 신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는 커피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조금씩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쓴맛과 신맛도 향기와 더불어 기분 좋은 맛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느끼면서 말이지요.

아인슈타인은 시간에 대해 '절대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란 관찰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물리량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꿈꾸고 계획하고 실행하며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낄 수만 있다면요. 시간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흘러가지 않을까요.

백옥경/구미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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