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뜻하지 않은 사고로 나는 꽤 '겁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날부터 며칠간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내 귀에는 온통 빗소리로 꽉 찬 수중 세계, 아름다운 물의 나라가 그려졌다. 그리하여 꿈꾸게 되었을까. 나의 그 꿈속까지 밀고 들어오는, 비가 이루는 크고 푸른 파문의 한 호흡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닷속 웬 종이었을까. 나는 그 거대한 청동의 종 속으로 숨었던 것 같다. 나는 신기해하며, 그 종을 울리며, 또 그 종소리에 끌리며 계속 종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 같다. 비몽사몽 그랬다.
그 새벽도 열어 놓은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깐 눈을 떴을 때, 내 철 침대 옆에는 병색 짙은 한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말기 위암 환자였다. 그렇게 그 할머니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날 새벽을 뜬눈으로 꼬박 지새우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첫새벽, 정신이 가장 맑아지는 시간 아닌가.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 그 첨예한 감각의 더듬이가 유리창의 빗물과 함께 반짝였다. 살아온 날들을 단지 몇 가지 항목으로 요약하는 듯한 저 명료한 눈빛. 단호하게 다문 입술빛이 놀랍도록 선명했다. 나는 노인에게서 다가오는 죽음의 검은 발걸음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노인은 그렇듯 극도의 고통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 또 잠깐씩 통증으로부터 풀려난 듯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다. 질기고 긴 고통, 짧은 평화의 시간이 반복되었다.
할머니에겐 네 명의 딸들이 있었다. 그 딸들이 돌아가면서 간호를 하였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데 둘째딸의 손길은 아주 남달랐다. 노모에게 성가를 불러주는가 하면, 동화를 읽어주는 등 지극 정성이었다. 그날은 또 "엄마 책 읽어 줄게, 들어 봐봐"하면서 펼쳐든 책은 어린이용 삼국유사였다. 그때 나도 귀를 세워 들었는데, 내용인즉슨 용궁에 드는 수로부인에 대한 부분이었다.
며칠간 병실을 함께 쓰게 된 노인을 통해 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삶에 대한 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환자의 작은 신음을 천둥처럼 들을 수 있는 경지, 그것은 바로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엿새 후 나는 퇴원했다. 노인은 어찌 되었을까. 그 착한 딸이 또박또박 읽어주던 수로부인의 장면을 떠올려본다. 할머니는 지금쯤 당신의 '거대한 꿈' 속으로 무사히 건너갔을까. 그랬을 것이다.
석미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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