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정일근의 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시인은 다시 '나의 고래를 위하여'란 시에서는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면 당신의 전생은 고래다.(중략) '보고 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라고 읊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전생도 고래였음이 분명하다, 천 날 만 날 이름 지울 수 없는 무엇이 보고 싶고 그 그리움이 절절하여 시인이 고래를 기다리듯 나도 온종일 무엇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동해바다의 '고래'는 정작 고래일 수도 있고, 고래가 아닌 여인일 수도 있다.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건 골목길 마지막 외등/ 깜깜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울산시 어업지도선 목측조사관으로 임명된 시인은 동해의 고래탐사에 나서 망망대해에서 물 위로 뛰어오르는 고래를 기다리는 일이 희미한 외등 골목길에서 '너'를 기다리던 때처럼 조바심이 나고 초조했을 것이다. 그의 '고래'에 관한 시편 속에는 고래와 여인이 서로 오버 랩 되기도 하고 서로 교차되면서 시의 행간을 끌고나간다.
나도 바다를 좋아하고 고래를 사랑한다. 시인은 벌써 수년 전부터 고래탐사에 천착하여 틈만 나면 배를 타고 동해를 휘젓고 다니지만 나는 바다 복판에서 고래 구경을 한 적은 없다. 다만 운 나쁜 고래들이 어부들이 쳐둔 자리그물에 걸려 숨이 끊어진 상태로 끌려온 것들을 몇 점 맛보는 재미 때문에 고래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배를 타고 고래를 구경하는 시인은 고급이고 고래고기를 먹는 나는 저급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이렇게 크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애완견을 훈련해 무슨 콘테스트에 나가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삼복더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개장국을 훌훌거리며 먹는 그 재미도 보통은 아니다. 개 콘테스트는 역시 상급이고 껍데기 한 쟁반에 소주 한잔 걸치는 것은 하급인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고래 고기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릴 적에 가난과 남루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별난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이 없다. 맛없는 개떡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말해 무엇하랴만 남들이 말하는 '맛존 고래 고기'는 고등학교 다닐 때 보긴 했어도 먹어보진 못했다. 동산병원 남쪽 내당동 가는 길가에 고래고깃집이 서너 집 있었다. 하학길에 그 길로 지나오면 고래고기는 대소쿠리에 삼베 보자기를 덮어쓰고 자고 있었다. 냄새가 하도 요상해서 먹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았지만 그건 '그림 속의 고기'였다.
농촌에서 열차 통학을 하던 암흑기가 끝이 나면서 내 나름의 독립기가 찾아왔다. 직장을 얻어 뛰어다니다 보니 일식집에서의 회식 자리가 심심찮게 열렸다. 그때마다 고래 고기가 작은 접시에 몇 조각씩 나왔다. 고래 고기 특유의 냄새 탓인지 동석 손님들은 별반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의 젓가락이 생선회 쟁반 위에서 풍월을 즐기고 있는 동안 슬슬 눈치를 봐가며 후딱 먹어 치워버렸다. 나의 식성은 몬도가네파에 아주 가깝다.
정일근 시인은 동해의 고래를 만나러 오랫동안 바다 위를 떠다녔지만 나는 쟁반 위에 누워 있는 고래를 만나러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1980년대 초 장생포 할매집의 주인 할머니는 "오늘 몇 시에 도착합니다"하고 전화 한 통만 하면 대창, 우네, 정술 등등 온갖 희귀한 부위의 고기를 다른 자리 손님들의 눈치를 봐가며 내주곤 했다.
요즘도 구룡포 쪽에 놀러 갈 일이 있으면 게를 먹든 생선회를 먹든 간에 끝판에는 고래고기 가게에 들러 반드시 맛을 보고 돌아온다. 구룡포 해수탕 옆 모모식당(054-276-9856)에 들러 5만원짜리 도시락 하나를 사면 서너 명이 '호랑이 꼬랑지' 바닷가에 앉아 소주 몇 병은 거뜬하게 비울 수 있다.
그런데 서울에 사는 후배가 "고래 고기 한 번 실컷 먹어 봤으면"하고 전화한 지가 꽤 됐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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