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백일장] 웃음으로 채색한 눈 온 다음 날 풍경화/보고 싶은 그녀/망자(亡者)와의 동거

♥수필 1-웃음으로 채색한 눈 온 다음 날 풍경화

어제 '첫눈'으로 이름 하기에 너무나 흡족하게 흠뻑 내린 터라 욱수골 전경이 기대가 되어 커피 한 잔을 들고 베란다 창가에 섰다.

기대만큼이나 맑은 햇살과 하얀 눈의 합성으로 멋지다 못해 찬란함을 연출하는 원경을 잠시 감상하는 사이 재잘거리는 음향 효과와 더불어 바로 눈 밑에 깔린 근경에 시선이 머물렀다.

필로티 형식의 아파트 구조라 1층 주차장에서 2층 아파트 정원으로 오르는 길은 미끄럼타기에 딱 좋은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제 내린 눈이 미끄러움을 보태주어 도심 한중간 집 앞에 천연 썰매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온 동네 종이박스를 다 구해왔는지 폭신폭신한 상자를 깔고 주르르 주르르 잘도 내려온다. 덩치 큰 아이는 스키장의 최고급 코스인양 직할강으로 쫙~내려오며 시원한 웃음을 날리고, 작은아이들은 양발로 브레이크를 잡으며 주춤주춤 내려오다 어느 순간 탄력 붙여 주~욱 내려와선 대단한 양 신나는 웃음 빵빵 날린다.

안전속도 지키며 먼저 출발한 아이에게 뒤에 오던 속도위반 아이가 옆구리를 들이받아 미끄덩~ 같이 뒹굴고서도 함께 깔깔거리며 배꼽 잡는다.

그 아래는 아이들의 웃음을 사랑으로 접수하며 눈으로 같이 즐기는 젊은 아빠들의 푸근한 미소도 보인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창 안의 내 입가에도 어느새 잔잔한 평화의 미소가 인다.

권미해(대구 수성구 욱수동)

♥수필 2-보고 싶은 그녀

그녀와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은 학교에 다녔다. 학창시절, 나의 추억 속엔 늘 그녀와 함께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가정 방문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가정 방문 오시던 날 선생님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군데 같은 아파트니까 사이좋게 지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녀는 외동딸이었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만은 한결같았다. 우리는 다른 점도 있었지만, 비슷한 점이 더 많았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다시 한 반이 된 우리는 지각대장이었다.

그녀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나 역시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등교할 땐 같이 지각했고, 수업을 마치면 같이 도서관으로 갔다. 누가 책을 많이 읽는지 내기하듯이 책 속에 파묻혔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그녀가 좋아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내가 좋아했다. 지각을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우정은 더 돈독해졌다.

학창시절'얼굴 용'자가 들어간 이름에 늘 불만이 많았던 그녀였다. 세월이 흐른 후 그녀를 궁금해하고 있을 때 '신춘문예' 당선소감과 함께 실린 사진에서 난 그녀를 보았다.

개명을 해서 당선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몇 달 뒤, 본격적인 글쓰기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그녀는 바라던 대로 방송 작가가 됐다.

보고 싶은 그녀는 학창 시절, 나의 가슴에 따뜻한 우정으로 한 땀 한 땀 수놓아 준 친구다. 지금은 흑백사진 속의 주인공이 된 그녀. 추억은 늘 아름답고 소중하다. 그녀와의 추억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나의 학창시절을 추억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오늘 그녀가 정말 보고 싶다.

최수임(경산시 정평동)

♥시 1-망자(亡者)와의 동거

오늘도 그가 왔다

농아의 흉내를 내며

발자국 소리도 없이 창문 너머

흰 이빨을 드러낸다

기운찬 음색들로 가득 찼던

휘나래들은

한 줄기 흙탕물 되어

눈살을 찌푸리고

삶의 씀바귀를 씹다가 내뱉은

이승,

희미한 안개에 갇혀

하찮았던 삶의 장막은

드리워진 지 오래

못다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늘도 문지방을

서성이다

비린 혀끝을 치켜들고

내 혼을 들쳐 업고

허무의 영역으로 끌어다 놓으면

난 이미 잠을 깬다

맨살을 부비던 그 침상은

거추장스러움의 떨거지

문 걸어 잠그는 이 밤

언제나

모가지를 내미는

사람이여

문정연(경산시 옥곡동)

♥시 2-진달래, 꽃비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냉이, 꽃다지 길섶 풀꽃들의

옹알이 같은 말들을

애써 외면한다

그대가 있는 그곳

젊은 날

바지게 무게만큼 무거웠을 어깨

등날 휘도록 무거운 거름 내려놓고

봄이 되면 소 몰고 쟁기로 묵정밭 갈아엎어

씨앗을 뿌리던 곳

무거운 거름 내려놓은

빈 바지게 한 귀퉁이에

한 아름 꺾어 담은 진달래꽃

말없이

내 손에 안겨준 그대

장독대 빈 항아리 찾아

진달래꽃 꽂아 두면

봄은 진달래 꽃물처럼 환하게 번졌다

유품으로 남은

그대의

닳고, 낡은 지갑 속에

꽂혀 있는

연필화같이 흐릿한 흑백스냅 사진을 보며

왜 한 번이라도

그대 어깨에 멍에처럼 짓눌린 무거운 짐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가슴이 먹먹하여

진달래 꽃물 같은 눈물이

뚝, 뚝 흘러내렸다.

백미혜(대구 수성구 신매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윤보원(구미시 공단동)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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