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법 감정'. 주로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받을 만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여론을 타고 법정으로 향한다. 판결에 적잖게 작용한다. 판사가 피고인을 앞에 두고 "국민 법 감정을 감안해…"라며 판결문을 읽을 때다. 그래서 '죄형법정주의'(범죄 처벌은 규정된 법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형법상 기본 원칙)를 부정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직된 법의 잣대를 보완하는 역할에 주목하자는 목소리가 맞선다.
법의 판결과 국민 법 감정 사이에는 늘 소통하고 이해해야 할 여지가 생겨난다. 이를 메워주는 매개체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바로 '영화'다.
◆역사를 바로 세워라, 영화의 힘
우리 사회에 실제 팽배한 국민 법 감정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달 개봉한 '26년'(조근현 감독)이다.
영화 26년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후손들이 모여 '그 사람'이라 불리는 학살의 주범을 단죄하는 과정을 그린 팩션(faction'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덧입힌 장르)이다. 원작은 온라인에서 먼저 인기를 끈 같은 제목의 웹툰(2006'강풀 만화가 저)이다.
영화 26년을 가로지르는 국민 법 감정이 본격 촉발된 시기는 1997년 12월 22일이다. 같은 해 4월 법정이 12'12사건을 군사반란으로, 5'18사건을 내란 및 내란 목적의 살인행위라 단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1년도 채 안 돼 특별 사면된 날이다. 1995년 12월 김영삼 정부가 '5'18 특별법'을 제정한 이후 2년여의 검찰 수사 및 공판 끝에 구속시킨 전 전 대통령이 석방된 것이다. 그러자 5'18 민주화 운동 피해자 및 유족들이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을 요구하게 됐다. 이후 전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평가의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됐고,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는 전 전 대통령의 발언이 희화화되는 등 대중적(?) 요소도 영화의 흥행 요인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도 영화 26년은 잊혀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영화가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제시하며 주목받고 있다. 이달 9일 기준으로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사회 문제 고발하는 영화
미해결된 '과거' 사실을 다룬 영화만 국민 법 감정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일어나는 사회 문제도 영화화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같은 날 개봉한 영화 두 편이 있다. '돈 크라이 마미'(김용한 감독)와 '범죄소년'(강이관 감독)이다. 요즘 사회적 화두인 '청소년 범죄'가 공통 소재이지만 다소 상반된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는 또래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딸, 그리고 사회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청소년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범죄 확산 및 재범을 부르고, 정작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극 중 성폭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은 증거 부족 및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은 후, 같은 범죄를 거듭 저지른다.
올해 대법원이 발간한 사법연감에 따르면 또래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청소년 수는 2002년 60명에서 올해 690명으로 11배 이상 급증했다. 물론 청소년들의 장래를 고려해 경미한 처벌로 자숙의 기회를 줘야 하지만 요즘 현실 속 부작용을 보면 대책이 시급하다는 게 영화의 입장이다.
영화 범죄소년은 미성숙한 청소년기에 저지를 수 있는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낙인 세태를 꼬집는다. 통계에 따르면 소년원에 가는 청소년의 80%가 폭력'절도 등 단순 범죄자이고, 주로 소외계층 출신이다. 빈곤을 못 이긴 청소년들은 단순 범죄를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사회 체계는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현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손가락질이 과연 정당한지 영화는 묻는다.
두 영화를 모두 관람했다는 직장인 이규성(35'경산시) 씨는 "학교 폭력 등 청소년 범죄가 만연한 상황에서 영화를 보며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에는 청소년 범죄를 단순히 뭉뚱그려 인식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측면을 이해하게 됐다"며 "영화를 계기로 관련법과 제도 개선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흉악 범죄에 집중되는 국민 법 감정
이외에도 국민 법 감정을 대변하는 영화가 많다. 흉악 범죄를 다룬 영화들이다. 던지는 화두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범죄 처벌 강화'다. 공소시효 연장과 형량 강화가 대표적이다.
공소시효 제도는 범죄 혐의자의 도피 등으로 인해 일정 기간 공소가 제기되지 않은 경우 형벌권이 사라지는 것이다.
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더라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추가 범죄를 일으키지 않은 범죄자의 생활을 존중해 법적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흉악 범죄에 대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범죄자를 반드시 잡아 엄벌해야 한다"는 국민 법 감정이 나오고 있는 상황. 실제로 범죄자를 '끝까지' 추적할 수 있는 과학적 수사 기반도 마련됐다.
이러한 국민 법 감정을 촉발하는데 영화도 적잖게 기여했다. 그러면서 실제 관련 법 개선을 이끌어낸 기념비적인 사례가 있다. 장애인학교 교직원의 장애인 학생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져 지난해 개봉한 영화 '도가니'(황동혁 감독)다. 영화는 일명 '도가니법'을 이끌어 냈다. 개봉 2달여 만인 지난해 10월 아동'장애인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국회에서 통과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가리킨다. 개정 법률에 따르면 아동'장애인을 성폭행할 경우 최대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공소시효는 아예 폐지됐다. 올해 8월부터는 피해자의 처벌 의사와 상관없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이 더욱 강화됐다.
살인 범죄에 대한 국민 법 감정을 대변하는 영화가 가장 많다. 살인의 추억(2003'봉준호 감독), 그놈 목소리(2007'박진표 감독), 내가 살인범이다(2012'정병길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살인의 추억'은 영구미제로 남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그놈 목소리'는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이 불가능해진 아동 납치 및 살해사건을, '나는 살인범이다'는 공소시효 만료 후 버젓이 얼굴을 드러낸 연쇄살인범과 형사의 대결을 소재로 삼았다. 모두 국민들의 안타까움과 분노 섞인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들이다.
이러한 영화 개봉 및 관객 수가 점점 누적되더니 실제 법과 제도의 개선을 이끌어내고 있다. 사형에 해당되는 살인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지난 9월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1997년 이후 사건에 적용될 예정이다. 현행 살인 범죄 공소시효는 25년에 불과하다.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는 '사형제 유지 및 폐지 논의'다. 지금까지 개봉한 영화들은 사형제 폐지에 무게를 두고 있다. 같은 제목의 소설(2005'공지영 작가)이 원작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송해성 감독)이 대표적이다.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면서 삶의 욕구를 갈구하는 사형수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 '집행자'(2009'최진호 감독)는 사형을 집행하며 극심한 고뇌를 겪는 교도관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형제 폐지 주장을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사형제에 대한 국민 법 감정은 실제 사회 변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다만 흉악 범죄가 실제 발생할 경우 '사형제 유지 및 실제 집행'에 무게가 실렸다가, 영화를 계기로 '사형제 폐지'로 무게가 옮겨지는 과정이 반복되며 국민 논의의 폭이 점점 넓혀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작' 즐기는 시대
최근 한국영화가 국민 법 감정을 대변하고, 사회 변화에 영향을 주는 모습에 대해 김삼력 영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오락 영화만 즐기던 시대에서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적 영화도 향유하는 시대로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주 6일 근무제 시대에는 휴일에 오락 영화를 즐겼다. 휴일마저 심각한 현실을 반영한 무거운 영화를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점차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향유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영화 '도가니'를 계기로 문제적 영화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이 줄어들면서 제작사도 국민 법 감정에 소구하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이를 관객들도 문화적으로 수용하게 됐다"며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내지는 분노를 표출하려는 욕구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이를 요즘은 영화가 소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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