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야문화의 세계화] ⑦일본에서 찾은 대가야의 흔적

미개했던 왜국에 선진문물 전파한 대가야인의 기상

일본과의 교역 루트 출발지였던 섬진강 하구의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포구.
일본과의 교역 루트 출발지였던 섬진강 하구의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포구.
대가야 항해자들이 오가면서 숱한 애환을 남겼을 일본 세토내해의 구루시마 해협.
대가야 항해자들이 오가면서 숱한 애환을 남겼을 일본 세토내해의 구루시마 해협.

1천500여 년 전 대가야인들은 멀고 먼 왜국(倭國)까지 와서 무엇을 했을까? 그들이 당시로는 미개했던 일본 땅에 문물을 전해주고 교역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기록도 없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없다. 남아있는 것은 오래된 무덤뿐이다. 일본에서 5세기 중후반의 고분을 발굴하면 예외 없이 대가야인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박천수 교수(경북대 고고인류학과)는 일본열도에서 대가야의 중요 유적만 해도 27개 현, 70곳에 달한다고 했다. 당시 오지를 제외하고 인구가 제법 있었던 곳마다 대가야인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대가야인들이 왜국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헤집고 다녔음이 분명하다. 뛰어난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던 그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 흔적을 찾아봤다.

■시코쿠는 중간 기착지

일본으로 가는 항해 루트의 출발점은 대가야가 제해권을 장악한 섬진강 하류인 경남 하동이었다. 이곳에서 부산 앞바다를 지나 혼슈와 규슈의 경계지점인 간몬(關門)해협을 통과해 해안선을 따라 항해한다. 그 다음 세토내해(瀨戶內海)를 거쳐 야마토 정권이 있는 관서지방(오사카와 그 인근 지역)으로 향했다. 세토내해는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와 작은 섬인 시코쿠(四國) 사이를 가르고 있는데 폭이 좁고 자그마한 섬이 점점이 박혀 있어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작은 바다다. 작은 목선에 몸을 맡긴 채 수천 리 여행을 해온 대가야의 여행자들은 눈앞에 들어오는 시코쿠섬에 자연스레 상륙해 여행의 피로를 풀었을 것이고, 일부는 오래 머물기도 했을 것이다. 대가야의 여행자라면 누구나 찾았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현재의 에히메현(愛媛縣) 이마바리시(今治市)와 마쓰야마시(松山市) 바닷가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마바리시의 바닷가에서 4㎞ 떨어진 낮은 구릉지에 있는 가라코다이(唐子臺) 유적지에서 대가야산 특유의 굽다리 접시 2점이 발굴됐다. 가라코다이의 '가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가야인들의 집단거주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인접한 오치군의 아사쿠라촌에 위치한 기노모토(樹之本) 고분과 죠가타니(城ケ谷) 고분에서는 각각 목 긴 항아리(長頸壺)와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 목 짧은 항아리가 출토됐다. 목 긴 항아리는 목 부분에 세 겹의 물결무늬와 부드러운 곡선의 몸통이 특징인 아름다운 토기다. 고령 지산동 32호 고분에서 나온 것과 같은 모양이다. 아사쿠라미술고분관 학예원 구보타 도시코(54)씨는 "옛날에는 이 마을에 항구가 있었고, 교통이 편리하고 살기 좋아 호족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며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항해자들이 시모노세키를 통과하고 나면 맨 먼저 보이는 항구였던 만큼 가야인들은 이곳 호족들과 문물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인의 집단거주지 발견

이마바리시, 마쓰야마시 등 에히메현 곳곳에서 대가야인의 유적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에히메현에서 가야산 토기가 발견된 장소만 해도 14곳이다. 에히메현매장문화재센터 오카다 도시히코(58) 조사과장은 "5세기 때의 무덤을 발굴하다 보면 일본 양식이 아닌 토기가 자주 발견되는데 신라산 1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대가야산"이라고 했다. 그는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이노쿠보(猪の窪) 고분인데 석관(石棺)을 쓴 것에 미뤄 대가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집게, 도끼 같은 청동 도구와 철 제품이 부장돼 있었다"며 "당시에는 철(鐵)을 다루는 기술자를 매우 귀하게 떠받들었기에 철공소의 우두머리로 보인다"고 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마쓰야마시 인근에서 가야인의 집단거주지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 고속도로 공사를 하던 중 200여 가구의 집단 취락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중 10가구에서 가야산 토기 파편이 대거 나왔다는 것이다. 그 토기 파편은 박스에 담겨 에히메현매장문화재센터에 소장돼 있다. 에히메현교육위원회 전문학예원 도미타 히사오(45) 씨는 "아직 본격 연구에 들어가지 않은 단계지만, 가야인의 집단 거주지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며 "대가야 출신 기술자들의 취락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정치적 이유로 이곳에 집단 이주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마쓰야마시 인근에서 놀랍게도 한국식 가마의 흔적도 3곳이나 발견됐다고 한다. 일본에 산재한 대부분의 대가야와 연관된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예산 문제로 인해 3곳 모두 시굴조사만 했고 발굴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카다 과장은 "예산이 확보되면 우선순위로 발굴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더라도 대가야인들의 위대함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1천500여 년 전 일본 열도 곳곳에 철, 토기, 문자 등의 선진문물을 전하며 그 위세를 떨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진다. 대가야인들은 뛰어난 문화력뿐만 아니라 도전정신까지 갖고 있던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일본 에히메현에서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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