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항에서 흑산도로 가는 섣달 바닷길은 잔잔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거울 같은 바다 위를 쾌속선이 미끄러지는 듯 달린다. 뱃길로 두 시간. 홍어의 섬 흑산도는 점점이 박혀 있는 목포 앞바다의 섬들 사이를 지나 사방이 바다인 수평선을 넘어서면서 그 윤곽을 드러냈다. 잘 삭혀 낸 홍어회처럼 여객 터미널에 배가 들어서자 섬 바다 내음부터 코를 톡 쏘는 듯하다.
◆50년 전통 흑산홍어 달인
흑산도 포구에 내리면 홍어 전통요리 전문 집이 즐비하다. 홍어회 4만원, 홍어무침 4만원, 홍어찜 5만원, 홍어탕 4만원. 포구가의 상점들은 죄다 홍어집들. 집집마다 써 붙여 둔 가격표는 거의 비슷비슷하다. 홍어잡이 어부가 직접 운영한다는 성우정식당을 찾았다. 여객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이 집 주인 김영창(76) 씨와 박춘자(72) 씨 부부는 평생 홍어만 만지고 살았다. 1963년 흑산도에 들어온 이후 올해로 50년째다.
"자자 이리 앉아 봐요. 아랫목이 뜨끈뜨끈한 게 온몸이 그냥 녹아 부러" 주인 김 씨가 일행을 보자마자 안으로 안내한다. 전국에 소문난 여느 집들처럼 이 집도 벽면이 온통 상장으로 뒤덮였다. 1994년 허경만 전 전라남도지사로부터 받은 남도음식축제 홍어애탕 부문 최우수상을 시작으로 홍탁삼합 부문 대상, 흑산도 홍어찜 우수상, 전통음식문화제 대상 등 도지사한테 받은 상장과 상패가 수십 개도 넘는다. 신안군수로부터 받은 청결상과 친절상도 눈에 띈다. 2001년 전남도 주최 세계음식문화큰잔치에서는 신안군 대표 향토음식점으로 출전해 대상을 받았다. 상장 모두가 두 분의 명의다. KBS 생방송 저널과 6시 내고향, SBS 모닝와이드, MBC 맛있는 TV에는 '흑산도 홍어 맛의 달인'으로 소개됐다. KBS '체험 삶의 현장'도 이 집에서 찍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벽면만 쳐다보고 있는 일행들에게 한마디한다. "벽면이 쬐깐해서 안방에도 그냥 쌓아 놓은 게 많어요." 김 씨는 '홍어만큼은 내가 최고'라는 듯 어험 헛기침을 한다.
"어디 먼저 우리 홍어 광을 한번 보실게요?" 뒤뜰로 데려간다. 저온저장고처럼 생긴 창고 앞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다. 홍어 입고 날짜다. 문을 여니 톡 쏘는 홍어 냄새가 진동을 한다.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 다르다. 7㎏짜리 한 마리에 평균 50만원 선. 삭힌 것은 많은데 싱싱한 것은 없다. 금방 팔려나가니 저장할 새가 없단다. "싱싱한 놈은 예약으로만 팔 수 있어. 현재로는 없제. 요새는 날씨가 워낙 나빠서 그래. 예약해야만 경매에서 빼놓제."
잡은 홍어는 반냉으로 보관한다. 창고 내부는 섭씨 0℃ 정도의 얼 듯 말 듯한 온도. 얼면 못 쓴단다. 그래서 절대 얼리지 않는다. 천천히 삭히려는 방식이다.
"너무 상온에서 급히 삭히면 물러져 부러. 냉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천천히 삭혀야 제대로 삭혀지는 거이지. 냉이 영 없으면 그냥 육질이 골아 부러요"
◆흑산도의 전통 '홍탁삼합'
홍어를 썰면 날개 쪽 잘려진 부위에서 눈부신 홍색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홍색 위에 파르스름한 비췻빛까지 서린다. 아! 이래서 홍어라고 하는구나. 육지 시중에 나도는 홍어는 전체가 누르스름한데 흑산도 홍어는 빛깔부터가 다르다. 마치 잘 익어 벌어진 석류처럼 붉다. 주방일을 끝낸 박 할머니가 막걸리를 내온다. 이제 홍탁을 보여 주는가 보다. "쉿 흑산도에는 양조장이 없어요. 이 술은… 말하자면… 밀주지." 아니 홍어섬에 탁주가 없다니! 김치도 작년 김장 때 담근 묵은지다. "어 그란디 삶은 돼지고기는 왜 없나?" 뒤늦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돼지고기 접시가 상 위에 오르면서 삼합도 완성됐다. 다들 먼저 홍어회 한 점에 막걸리 한 잔으로 본토의 홍어 맛을 음미한다. 박하사탕을 먹었을 때처럼 입안이 화해진다. 톡 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구나! 막걸리 순배가 이어지면서 초고추장에다 홍탁과 삼합으로 좌중은 금세 남도의 맛에 흠뻑 취한다. 입속에서 강력한 세 가지의 맛이 충돌한다. 곁들여 낸 바지락탕이 너무 뜨겁다. 홍어로 자극받아 입안이 얼얼해졌기 때문이다. "찬 홍어회를 먹는데도 이마에 땀이 쪽 나지? 참 신기하지 않아요? 허허허." 흑산도 홍어 자랑에 여념이 없는 김 씨는 "홍어는 강력 소화제여서 뼈도 다 묵는 것이여"라면서 한 점 거든다. 같은 부위라도 살점이 두꺼운 부분이 더 붉은 게 우수 품질이란다. "닷새가 되든 열흘이 되든 한 달이 넘든 거의 비슷비슷하게 삭혀 내는 게 진짜 기술이제." 톡 쏘는 냄새는 아가미 쪽과 뱃살 쪽이 더 강하다. "어이, 이제 홍어찜도 선봬야지."
삭힌 홍어찜은 특유의 냄새가 회보다 더욱 진하다. "이거이 소염제여. 홍어는 약이지." 잘 삭힌 홍어탕 한 그릇이면 배탈도 나아 버린단다. "다른 생선은 홍어처럼 삭혀낼 재주가 없지요. 다 썩어버리지." 씹을수록 알싸한 맛이 입안에서 확 퍼진다. 비염이 있는 사진작가 차종학 씨가 "동굴 속에 들어서는 듯 콧구멍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한 이 기분. 이 강렬한 홍어 냄새가 입과 코를 확 후빈다"고 하면서 탄성을 내지른다. 다 먹고 나도 강한 뒷맛이 입안에 맴돈다.
마지막으로 내 온 홍어탕은 삭힌 홍어로 매운탕처럼 끓였다. 미역국같이 미끈하게 끓여낸 후 부추를 송송 썰어 넣었다. "홍어 애(간)가 꼭 들어가야 탕이 돼요. 끓이면 다 녹아져 부러지요." 정확히 말하면 홍어애탕이다. 푹 끓여 놔서 아무리 굵은 홍어 머리뼈도 다 먹을 수 있다. 톡 쏘는 냄새는 뼈에서 더 강하다. 오독오독 씹히는 물렁뼈는 톡 쏘는 냄새와 구수한 탕 맛이 어우러져 맛 자체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 이것이 홍어의 제맛이구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일행을 쳐다보고 있던 김 씨는 자꾸 더 먹기를 권한다. "홍어탕은 소화가 얼른 돼야 부러요. 아무리 많이 먹어도 괜찮혀요."
◆강력 스토리텔링,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
홍어 수놈은 꼬리 좌우로 큼지막한 어른 손가락만 한 '거시기'가 2개 달려 있다.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는 말은 이 섬에서 탄생했다. '내가 홍어 거시기인 줄 아느냐'는 표현은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할 경우 강하게 항의할 때 쓰는 말. 이 말은 흑산도 홍어를 전국화시켜 내고 유명세를 더욱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뭣 때문에 홍어 거시기가 만만한가 하면 시장에 내다 팔 때 이거이 '달려 있어도 그 값이고 떼내어도 그 값'이기 때문이지요".
큼지막한 홍어 수놈을 펴놓고 '거시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 씨의 말을 들어 보면 그 옛날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은 섬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돛단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홍어잡이 어부들도 숱한 배를 곯아야 했단다. 잡은 홍어는 돈이 무서워서 먹을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수놈 거시기만 떼 먹었다고 한다. "배가 포구에 닿으면 집에 가져가기도 했지요. 없어도 그만이니 뭐 꼭히 달아 둘 필요도 없고 해서…." 김 씨는 육지 사람들은 연유도 모르고 그냥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냐'고 하고 있다며 껄껄 웃는다.
"지금은 안 되지. 거시기를 떼버리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고 수놈을 더 맛있는 암놈으로 둔갑시켜 속여 파는 짓이 돼야 부러지."
자꾸 홍어의 거시기를 두고 손가락질을 해대자 삭혀진 홍어의 표정이 쑥스러운 듯 빙그레 웃는 것 같다.
◆향토음식 산업화는 외딴 섬에서도 너끈
김 씨의 홍어잡이 배는 서광호. 21t으로 작은 FRP 소형 배이지만 엔진은 388마력의 고성능이다. 선원이 6명인 이 배는 한번 출항하면 적어도 2박 3일 만에 귀항한다. 매년 산란기에 맞춰 홍어잡이에 나서 서해바다를 종횡무진 한다. 김 씨는 홍어는 산란기가 돼야 가장 맛있다고 설명했다. 홍어잡이 배는 흑산도에 모두 7척이 있지만 50년 전통의 김 씨가 제일 많이 잡는다. 앉아서도 바닷속 구석구석을 훤히 꿰고 있기 때문이다.
"홍어는 산란기가 되면 흑산도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알이 차야 살이 찌고 육질도 부드러워 맛도 최고가 되지요." 바로 흑산도 홍어가 유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육지의 나주 영산포 홍어가 유명해진 까닭도 흑산도 덕분이란다. 옛날부터 생필품을 실은 배가 섬으로 들어오면 섬사람들은 홍어를 돈 대신 건네고 생필품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흑산도 사람들은 홍어를 잡아 가마니에다 소금을 쳐서 차곡차곡 재워 두었다. 그 홍어들이 나주 영산포로 가서 비싼 값에 팔렸다. 흑산도는 잡고 나주는 팔고. 그래서 나주 홍어가 유명해지게 됐단다.
그런데 지금은 나주 영산포로 흑산도 홍어가 한 마리도 나가지 않는다. 이유는 경매된 홍어는 바코드로 국내산이라는 품질인증을 받고 인터넷과 통신판매로 전량 직판하기 때문이다. "돈 더 받는 소매로 팔지 싼값에 도매로 넘기는 바보는 이제 없지요." 얘기 중에도 홍어 택배를 주문하는 전화가 연신 온다. 골프장 내 음식점과 전국 한정식집이 주 고객들. 이제 향토음식 산업화는 어디서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해는 홍어가 안 잡혀 애를 태우고 있지요." 조황도 안 좋은데다 중국 배들이 들어와 그물을 망쳐놓는 통에 더욱 속상하단다. 배 시간이 다 되어서 일어서려는데 김 씨는 '홍어 한 마리'로 표현하는 귀한 홍어 간을 안주로 내놓는다. 서해 오지 섬 대중도에서 캔 하수오로 직접 담근 술을 따라 준다. "홍어 간은 입안에 들어가면 그냥 녹아부러. 참 꼬숩지요." 고춧가루 소금에 홍어 간을 찍어 보란다. 홍어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자 가시는 길잉께. 한 잔 더 받으시고." 혀에 미끄러지듯 아이스크림처럼 녹는다. 이걸 먹기 위해서 미식가들은 삭히지 않은 싱싱한 놈을 사간단다. 김 씨는 "우리 흑산도에 다시 오고 싶을랑가 모르겠어…"라고 하면서 작별을 아쉬워한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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