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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벽에서 내려와 몸을 낮추다…디지털 시대, 달력의 생존기

한국도자기가 2013년 새해를 앞두고
한국도자기가 2013년 새해를 앞두고 '12간지 달력 접시'를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롯데백화점 대구점 지하 2층 특설매장에서 고객들이 1980년대부터 30년간 출시된 달력 접시를 구경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대구 중구 동인동 한 달력 제작업체에서 직원들이 다양하게 제작된 2013년 계사(癸巳)년 달력을 살펴보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대구 중구 동인동 한 달력 제작업체에서 직원들이 다양하게 제작된 2013년 계사(癸巳)년 달력을 살펴보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매일신문의 대구경북 옛날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만든 새해 달력.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매일신문의 대구경북 옛날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만든 새해 달력.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독도의 아름다운 자연 사진을 담은 경북대 새해 달력. 경북대 제공
독도의 아름다운 자연 사진을 담은 경북대 새해 달력. 경북대 제공

이달 11일 대구 동성로 한 대형 서점의 문구매장을 찾았다. 연말 시즌인데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다양한 관련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매장 중앙을 가득 채운 주연은 다이어리 제품. 매장 벽면을 따라 길게 늘어선 조연은 크리스마스카드 제품. 그리고 매장 직원에게 물어 겨우겨우 찾은 엑스트라는 작은 진열대 하나를 차지한 달력 제품이었다.

다이어리, 크리스마스카드, 달력. 모두 이맘때 사이좋게 흥행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던 아날로그 친구들이다. 그리고 최근 스마트폰이 일정 관리 프로그램, 문자메시지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캘린더 애플리케이션으로 흡수해버린 것들이다. 그럼에도 다른 친구들과 달리 유독 달력은 인기가 시들시들해 보였다.

◆'일상 매니저' 디지털 달력 인기

알고 보니 달력은 '진화'라는 이름으로 속속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기본으로 내장된 디지털 달력이 있지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고, 일정까지 관리해주는 캘린더 애플리케이션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취업 포털 사이트인 인크루트는 최근 '공채 달력' 애플리케이션을 선보였다. 국내 기업의 공개 채용 일정을 정리한 것이다. 공채 일정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고, 전형 일정을 잊지 않도록 알림 기능도 넣었다. 공채 일정이 1년 내내 이어지고, 보통 한 번에 여러 군데 기업에 지원하기 때문에 바쁜 취업준비생들에게 요긴하단다.

이외에도 생활밀착형 캘린더 애플리케이션이 많다. 질병관리본부는 '예방접종 도우미' 애플리케이션을 내놨다. 다양한 예방접종 일정을 알려주는데다, 자녀가 받은 예방접종 기록을 조회해 빠짐없이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다. 우먼스타이머, 우먼스센스, 우먼로그 등 '생리 달력' 애플리케이션도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생리주기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체온 등 기타 증상을 기록해 건강관리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업들도 아날로그(종이) 달력을 제작하면서 캘린더 애플리케이션도 함께 내놓고 있다. 홍보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아날로그 달력에 QR코드(바코드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격자무늬의 코드)가 기록돼 있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면 회사 홍보 영상이 뜨거나 회사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디지털 달력의 득세를 마냥 진화로만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13일 오후 대구 향촌동. 김성환(66) 씨가 대구은행을 방문했다가 얻은 새해 달력을 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 씨는 "이맘때면 새해 달력 여러 개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웃 가게를 방문해도 주고, 집에 우편으로도 많이 왔다. 그래서 방마다 달력이 있었다. 같은 벽에 달력 2개를 걸기도 했다. 하나는 풍경이 좋은 관상용. 또 하나는 음력, 절기 등 글자가 많은 정보용. 하지만 요즘은 1. 2개 얻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에 담긴 디지털 달력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르신들은 아날로그 달력이 꼭 필요하단다. 김 씨는 "아침에 잠에서 깨면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이 벽에 걸린 시계와 달력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메모를 하기 쉬운 곳도 달력이다.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에 메모를 하지만 우리는 달력이 제일 실용적이다"고 말했다.

◆'대구 스타일' 새해 달력은?

달력은 기업들이 가장 많이 찍어낸다. 연중무휴 홍보 수단이기 때문. 지역 기업들도 마찬가지.

대구은행은 올해 탁상용 7만 부, 벽걸이형 38만 부 등 모두 45만 부의 달력을 제작했다. 지난해와 같은 규모다. 탁상용과 벽걸이형은 콘셉트가 다르다. 탁상용은 '생활경제'를 주제로 금융 관련 정보를 전하면서 대구은행의 금융 상품도 홍보하는 '정보+홍보'형이다. 벽걸이형은 서양화가 김대섭 씨의 작품과 12개 문구의 캘리그라피를 담았다. 매년 미술작품을 넣었지만 올해는 짧은 문구도 넣은 것이다. 1월 '시작하리라'부터 12월 '되돌아보리라'까지.

금복주는 올해 12만 부의 달력을 제작했다. 그런데 늘 아름다운 여성 모델 화보로 인기를 얻어온 참소주 달력에 올해는 반 고흐의 그림이 들어가 몇몇 마니아(?)들의 아쉬운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소식을 들은 직장인 박모(33'대구 동구 신암동) 씨는 "친한 술집 주인에게 부탁해 한예슬, 손담비, 박한별 등 참소주 전속모델 달력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달력은 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두산그룹은 1983년도 OB맥주 달력에 여성 모델 대신 국내 화가의 동양화를 담았다.

기업 달력은 주문이 9월쯤부터 들어오기 때문에 인쇄업계도 이때부터 바빠진다. 하지만 '달력 특수'는 점점 옛말이 돼가고 있다. 제작 비용이 연말 예산에서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하는데다 다른 최첨단 홍보수단에 밀려 달력의 홍보 효과도 점점 약해지고 있어 제작 물량을 줄이거나 아예 제작하지 않는 기업들이 적잖다는 분석이다. 대구 중구 동인동의 달력 제작업체 관계자는 "주문 물량이 매년 20%씩 줄고 있다"며 "매년 지속되는 경기불황 분위기와 스마트폰 이용자 급증 등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우리 지역 모습을 담은 달력도 적잖다. 올해는 '독도 스타일' 달력들이 눈길을 끈다.

경북대는 '독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주제로 찍은 사진 작품들을 새해 달력에 담았다. 현재 경북대 글로벌플라자에서 진행 중인 '독도의 자연전' 사진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지난 10월 경북대 북문에서 '대학생 독도 플래시몹' 행사가 열렸고, 9월에는 황의욱 경북대 교수의 독도 관련 논문이 SCI급 국제 저널에 게재되는 등 최근 이어진 경북대의 독도 사랑 움직임을 달력으로도 잇고 있다는 설명이다.

경상북도는 독도 사진을 주제로 달력을 제작한 것에 더해 최근 달력 배달 이벤트까지 열었다. 독도 달력을 외국인에게 선물할 배달원 2천13명을 이달 17일까지 선착순 모집하고 있는 것. 참가 방법은 신청자의 국내 주소와 선물 받을 외국인의 간단한 소개(이름'직업'선물하려는 이유)를 사이버 독도 홈페이지(www.dokdo.go.kr)에 올리면 된다. 선정되면 이달 중 신청자의 국내 주소로 배달된다.

대구경북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은 달력도 적잖다. 계명대는 올 한 해 동안 촬영한 대구경북의 사계절 사진을 새해 달력에 담아 학생 및 교직원에게 배포하고 있다. 영진전문대와 매일신문은 매일신문의 옛날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대구경북의 '그때 그 시절' 사계절 모습을 새해 달력에 담았다. 모두 정감 어린 추억의 흑백사진들이다.

◆시대상 보여주던 달력의 과거사

달력 제작 트렌드를 통해 과거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특히 기업이 가장 많이 제작하는 만큼 달력은 기업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지표였다.

1980년대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달력 풍년 내년 경기 겨냥한다' '달력 인심 회복되나' 등 호경기'불경기 예상 지표가 기업의 달력 제작 물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에는 두 달치를 한 장에 담은 여섯 장짜리 달력이 기본이었는데 한 달치를 한 장에 담은 열두 장짜리 달력을 내놓은 기업은 사정이 좋은 것으로 해석됐다.

반대로 기업 사정이 나빠지면 달력 제작 물량을 전년 대비 동결하거나 줄이는 것은 물론 규격을 작게 만들거나 그림 사진을 빼고 숫자만 넣기도 했다. 요즘도 마찬가지 모습이다.

기업이 달력 제작을 줄이면 화가들에게 불똥이 튀기도 했다. 1991년 12월 한 언론보도에서는 기업들이 달력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전에는 화가들의 그림을 사서 쓰던 것을 아름다운 풍경, 공예품 사진 등으로 바꾸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몇몇 유명 화가를 제외하고는 연말에 수백만에서 수천만원의 대목을 보던 다른 화가들이 울상을 짓게 됐다는 것.

해외 수출 달력 제작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해외에서 성공한 교포 실업인이 많다는 얘기였다. 1983년 11월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달력 해외 수출이 연간 100만달러를 넘고 있는데 해외 이주 역사가 긴 일본이 총 수출액의 50%, 미국이 30% 정도였다. 교포 실업인들은 주로 같은 교포에게 달력을 선물했고, 배경 사진으로는 고국의 향수를 달래주는 고궁, 한복 차림 인물, 산수화가 인기였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특히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달력 제작은 점점 줄어들었다. 1999년 삼성전자는 '삼(3)금령'을 내렸다. 당시 윤종용 사장이 일명 '자린고비 경영'에 나서면서 회사 돈으로 송년회 금지, 연하장 제작 금지, 그리고 달력 제작 금지를 엄명한 것. 그래서 당시 삼성전자는 업무에 필요한 탁상형 달력만 1인당 한 개꼴인 4만 개를 제작하는 데 그쳤다. 이런 분위기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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