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날마다 다양한 지류와 지종을 접하면서 살고 있다. 하루를 열어주는 신문용지, 단행본에 많이 쓰이는 백상지, 재생 펄프를 이용한 그린 용지, 종이컵이나 선물상자의 판지류 등….
21세기 신 파피루스, 전자책이 종이책과 공존하는 세상을 살고 있지만, 모니터나 모바일 세계가 종이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문자를 발견한 인류의 기록물은 돌, 나무, 동물가죽을 통해 남겨 있다. 알타미라 동굴 벽에,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이집트 나일 강 가에서 자라던 파피루스로 만든 용지에, 10세기 이상에 걸쳐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군림해왔던 양피지 등에 인류는 끊임없이 기록을 해왔다. 그리고 유럽에 문화적 충격을 던졌던 중국의 제지 기술이 탄생시킨 종이에 이르기까지.
그렇다면, 종이의 최대 고객은 누구일까? 고금을 통틀어 종이의 최대 고객은 인쇄'출판계가 아닐까.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중심 재료는 종이다. 종이는 책의 외형적 완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같은 텍스트와 도판(圖版)의 경우에도 종이가 가지는 물성에 따라 그 느낌이 아주 달라진다. 종이는 텍스트나 일러스트의 표현을 보다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저자와 편집자, 디자이너의 의도하는 바는 물론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의도도 연출해주는 소통의 매개체이다.
책에 있어 용지 선택은 대부분 기획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텍스트의 성격과 내용, 도판과 일러스트 등 편집디자인 방향과 인쇄 등의 작업 적성을 고려하여 용지의 종류와 파운드, 색상 등을 정하게 된다.
새로운 용지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나는 편집자 초년병 시절 종이와 관련된 실수를 많이 했다. 완벽에 가까운 이미지 표현, 작업 적성이 뛰어난 수입지 샘플북은 내 눈과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미려한 인쇄 감에 혹해 책의 성격을 벗어나게 하거나 예산을 초과하는 높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종이 질감에 매료되어 책 넘김이 불편한 책을 만든다거나 하는 등의 실수를 거듭하면서 용지 판별법이나 모험심 제어력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의도했던 것과 다른 책이 나왔을 때 편집자는 그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나는 지금도 새로운 종이가 출현하면 슬쩍 발동하는 호기심을 조심스럽게 조절하고 있다.
지금 한 권의 책을 펼치고 있다면 그 지면에 손을 얹어보라. 손끝에 닿는 종이의 물성 그 안 어딘가에 책을 쓰고 만든 이들의 메시지가 느껴질지도 모르니.
나윤희<출판편집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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