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모레가 동지다. 한 해가 시간의 열차를 타고서 또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가 보다. 12월의 끝자락에 서고 보니,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이 공연히 마음만 바빠 온다. 동짓날이 되면 어머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팥죽을 쑤셨다. 동지팥죽 한 그릇 먹을 때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고 했다. 나이 먹는다는 그 말에 혹해 팥죽을 몇 그릇이나 비웠다. 그러고 나면 나이와 함께 키도 훌쩍 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이 먹은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어서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린아이들한테는 이것저것 하라는 요구도 많고 하지 말라는 통제도 많은 것 같아서였다.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이 하는 것들을 해 보고 싶었다. 어른들만이 누리는 그 자유가 부러웠다.
동지가 가까워져 오면 하루가 다르게 밤이 길어진다. 밤이 긴 것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해만 빠졌다 하면 저녁술을 놓기가 무섭게 약속이나 한 듯 친구 집으로 모여들었다. 윷놀이도 하고 화투치기도 즐겼다. 머리 맞대고 숙제도 함께 했다. 내남없이 가난에 절어 있었던 시절, 긴긴 겨울밤 변변한 군입 다실 거리 하나 없었어도 또래끼리 모여서 보내는 그 밤이 그저 행복했었다.
한 해 두 해 나이테가 감겨 가면서 이제 동지팥죽 먹는 일이 자꾸만 겁이 난다. 밤이 길어가는 것도 점점 싫어진다. 팥죽 먹고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늙어져서 병마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또한 우리네 인생살이를 하루의 시간으로 따졌을 때 밤은 곧 죽음과 맞닿아 있는 시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夏至)만 넘어서고 나면 벌써 슬슬 걱정이 앞선다. 겨울이 되려면 아직 몇 달이나 남았음에도, 다가올 동지섣달을 또 어떻게 날까 하는 염려가 미리부터 마음을 옥죈다.
하지만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 대우주의 이법임을 어쩔 것인가? 지구가 태양을 돌며 끊임없이 밤과 낮이 갈마들 듯 삶과 죽음은 영원한 순환을 계속하는 것인 것을….
자연의 나이는 언제나 한결같은 빠르기로 흐르건만 심리적 나이는 세월 따라 바뀌어 간다. 십대는 10㎞/h, 이십대는 20㎞/h, 오십대는 50㎞/h, 팔십대는 80㎞/h의 속력으로 달린다는 이야기처럼, 이제 중년을 넘어 서서히 삶의 그림자가 길어갈수록 심리적 나이에 가속도가 붙는 것이 느껴진다.
영원히 피터팬이고 싶다. 비록 육신의 나이는 들어갈지라도 마음의 나이는 언제나 청춘이고 싶다.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이렇게 읊은 셸리의 시 구절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이 겨울을 슬기롭게 나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곽흥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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