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당선인으로서의 첫 행보로 국립현충원을 찾은 박근혜 당선인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맺혔다. 흉탄에 유명을 달리한 부모,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소에서다. 올해 만 60세인 그의 인생 역정은 차기 대한민국 행정수반으로서 첫 장면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15년의 청와대 생활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대구 삼덕동에서 육군 정보학교장이던 아버지 박정희 대령과 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 1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79년 이후 33년 3개월 만에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게 된 박 당선인의 청와대 생활은 중학교 때인 1964년 시작됐다. 대학생활을 마친 1974년에는 프랑스 유학을 떠났지만 육영수 여사가 8'15 경축식장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스러지면서 급거 귀국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충격에 대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슬픔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22세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분주한 삶을 살게 된다. 걸스카우트 명예총재직 수행과 새마을운동 정신을 이어가는 '새마음 운동' 전개 등 국내 활동도 활발했다.
◆18년의 칩거
박 당선인은 1979년 10월 26일 부친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생의 전환점을 다시 맞는다. 박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전해듣고 첫마디로 "지금 전방은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며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밝힌 바 있다.
박 당선인은 청와대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한 돈 중 6억원을 박 당선인에게 전달한 일은 대선 기간에 논란을 빚었다. 이번 TV토론에서 박 당선인은 "어린 동생들과 살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배려하는 차원에서 준다고 했을 때 경황없는 상황에서 받았다. 나중에 다 환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후 박 당선인은 정치권에 입문하기까지 18년간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박정희 체제에서 잘나가던 인사들이 대부분 그에게 등을 돌리면서 박 후보는 인생의 쓴맛을 봤다. 그는 자서전에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고 적었다. 이 시기에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학교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맡아 선친의 역사적 정당성을 외롭게 주장했다. 역사와 철학 서적들을 탐독하고 전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정신적 지평을 넓히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정치인으로서의 도전
박 당선인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공식 정치활동은 이듬해 4월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대구 달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다. 2000년에는 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부총재로 당선됐다. 하지만 2001년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 상향식 공천과 당권'대권 분리 등 '7대 당 개혁안'을 요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5월에는 방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철도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 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박 당선인이 '정치인 박근혜'로 거듭난 것은 불법 대선자금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고 나서다. 이른바 '천막당사' 시절 그는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만들어내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이후 2년 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5차례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40대 0의 완승을 거뒀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닉네임이 탄생한 배경이다.
짧은 한마디로 파장을 가져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광고에 쓰인 '면도칼 테러'가 일어났던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선거 판도를 바꿨고, '친박 학살'로 평가되는 2008년 총선에서는 "살아 돌아오라"는 말이 친박계 의원들의 대거 당선으로 이어졌다.
2007년 첫 대권 도전에 나서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하기도 했지만 현 정부에서 세종시 수정안 논란 등을 통해 '원칙' '소신'의 이미지를 더욱 굳혀 대망의 대권을 차지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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