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뮤직 토크] 도어즈

자유와 반항 정신이 만들어 낸 사이키델릭 미학

록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말, 미국 서부는 반전과 환각의 메시지가 공존하고 있었다. 베트남전 반전 시위로 시작된 민중의 목소리는 냉전시대 반핵에 대한 메시지를 토해냈고 흑인과 여성, 하위계층의 인권을 목놓아 외쳤다. 이들은 반복 등의 기법을 차용한 사운드와 회화, 패션, 조명 등을 예술작품으로 구체화했고 이는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이키델릭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비틀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정점에는 '3J'라고 불리는 세 사람이 있었다. 지미 헨드릭스와 제니스 조플린, 그리고 짐 모리슨이 그들이다. 그들 가운데 짐 모리슨은 밴드 도어즈 (The Doors)와 함께 사이키델릭의 시인으로 불렸다.

도어즈는 UCLA에서 영화와 연극을 공부하던 짐 모리슨이 레이 멘자렉을 만나면서 구체화한다. 두 사람은 모두 문학과 영화, 현대음악과 블루스에 심취해 있었는데 로비 클리거와 존 댄스모어를 영입해 밴드를 만든다. 밴드 이름은 앨더스 헉슬리가 쓴 알카로이드 흥분제에 관한 수필집의 서문에 있는'인식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차용하는데 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詩句)이기도 하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데뷔 앨범 가운데 하나인 도어즈의 1집 앨범은 수록곡 'Light My Fire'의 빌보드 1위 등극과 함께 도어즈 시대를 열었다. 이후 짐 모리슨이 참여한 마지막 앨범 'LA Woman'까지 블루스와 사이키델릭, 로큰롤과 프랑스의 카바레 음악까지 섞여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특히 짐 모리슨이 대부분 만든 가사는 철학적인 시어로 가득 차 있는데 광기와 반시대적인 감성은 원시적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인간의 절대 자유에 대한 의지를 신뢰했던 짐 모리슨은 무대에서도 기이하게 여겨질 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대중음악의 사회 참여에 부정적이던 닉슨 정부는 외설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도어즈를 억압하기 시작했다. 코네티컷에서 외설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는 등 활동에 위축을 받은 도어즈는 1971년 잠정적인 휴식기를 갖는데 이때 짐 모리슨은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된다.

그해 7월 짐 모리슨이 파리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1970년 3J의 다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유증이 가시기 전에 전해진 짐 모리슨의 사망 소식은 1960년대가 추구했던 이상을 품었던 청춘들을 좌절시킨다. 사회 참여가 문화예술을 매개로 했던 최초의 대중적 실험은 짐 모리슨과 함께 떠났고 사람들은 그들이 떠나 온 집으로 돌아갔다.

짐 모리슨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지금도 파리를 방문하는 전 세계 청년들은 이곳을 성지처럼 찾고 있다. 자유와 광기, 인간 존재의 어두운 부분을 통찰했던 짐 모리슨의 전설은 20세기가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미학 가운데 하나이다.

권오성(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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