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일본의 저성장-저금리 상황이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과 유사하다. 금리를 낮춰도 경제성장률이 오르지 않고 1~2%대에 정체되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
권혁세(56) 금융감독원장이 우리 경제사정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고 자칫하다가는 일본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던졌다. 금융감독 최고 당국자의 공개적인 경고는 전례가 없는 것으로 우리 경제에 대한 적신호가 잇따라 켜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권 금감원장은 "지금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많은 경제전문가들이나 정책당국자들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공개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지 당시의 일본 상황과 우리 상황을 항목별로 구체적인 데이터를 갖고 비교한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일본처럼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혹은 우리가 설마 일본처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처럼) 그렇게 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것과 현실은 다르다"고 힘주어 말했다.
일본은 1990년대 초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은행들의 부실 대출이 속출하고 저금리에 따른 역마진으로 보험사들이 줄도산하는 등 금융산업 전반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 이른바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이다.
이와 관련, 금감원 금융감독자문위원회는 이달 9일 저금리 저성장 기조 속에서 향후 18개 은행들의 경영환경 스트레스를 예측한 결과 보고서를 통해 "경제성장률이 1%로 떨어지고, 금리가 1% 포인트 하락하면 5년 뒤인 2017년 은행의 당기순이익은 현재보다 83.5% 급락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이렇게 될 경우 은행의 당기순이익은 올해 8조5천억원에서 2017년에는 1조4천억원으로 줄고, 2022년에는 마이너스 5조2천억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권 금감원장은 지난해 초 저축은행 사태가 터진 후 취임, 그동안 저축은행 사태 해결에 전력투구했다. 그 결과 부실 저축은행에 대한 정리와 감독 당국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장치 마련에는 성과를 거뒀다는 호평을 얻고 있다.
-일본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지적했는데 구체적으로 비교해줬으면 좋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구구조와 성장세의 변화 등 거시 여건을 볼 때 우리 경제가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 초기 상황과 유사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저성장'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인구증가율이 크게 둔화되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성장잠재력 약화가 우려되고 있다. 부동산 등 자산가격도 지난 수년간 크게 상승하였다가 자산시장이 갑자기 급랭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부동산 버블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또한 가계 저축률이 크게 하락한 가운데 가계부채는 GDP 성장률을 크게 앞지르며 급증, 가계의 건전성이 훼손되고 있다.
다행히도 금융회사의 건전성이나 정부의 정책여력 면에서는 우리가 90년대 초 일본에 비해 월등한 대응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따라서 아직 상황이 크게 악화되지 않았고 정책 대응능력이 충분한 초기 단계에서 일본의 장기불황 사례를 답습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금융감독의 수장이 이런 위기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선 것은 파격적이다.
"미국에서 40일 동안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와 미국의 차이점이 도로 표지판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왕 길을 찾지 못하기도 하는데 미국에서는 한 번도 길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도로표지판이 사전에 잘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딱 그 지점에 가야 알려준다. 그때는 이미 늦다.
이 비유와 맞는지는 몰라도 그런 위험에 대해 우리 경제에 대해서도 사전에 예고해줘야 한다. 가계도 기업도, 대형 사고 나는 것을 보면 하루아침에 그렇게 나는 법은 없다. 저축은행 사태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원인과 결과가 쌓이고 쌓여서 터진 것이다. IMF도 사전 사인이 있었는데도 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난리 쳤고 그때는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애써 현실화시키기보다는, 부딪칠 때까지 막판까지 가보자는 그런 생각이 있다.
정부나 금융당국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혹시라도 미리 알려줘서 경제심리를 위축시키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까 우려하고 있다.
내일 당장 닥칠 재앙은 아니지만 우리가 마치 고속도로에서 한 시간 전에 도로표지판으로 예고하듯이 경고한 셈이다. 당장 눈앞에 부닥치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충분히 대비하면 막을 수 있는 재앙이다."
-우리나라는 일본하고 닮은 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는 지적이 있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일본과 비슷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일본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은 내수 비중이 높은 반면 수출 의존도가 낮아 수출이 80%, 내수가 20%인 우리나라와는 경제구조가 다르다고 지적한 것을 보기도 했다. 수출이 잘 되고 세계경제가 나빠지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괜찮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일본은 수출이 어려워도 내수관리만 잘하면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우리는 수출마저 잘못되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더 나쁜 조건이다.
또 일본은 버블 위기에 처했을 때도 가계마다 금융자산이 많았고 외환 보유고도 엄청났다.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
-저축은행 사태에 대해서는 한 당사자로서 혹독한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금융감독 당국에 대한 국민신뢰도는 회복한 것인가.
"사실 저축은행 문제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뤄진 문제가 아니다. 10여 년 동안 제도부터 시작해서, 저축은행이라는 것이 원래는 서민들을 위한 소액금융기관이었다. 그것을 IMF 이후 은행과 같이 5천만원 예금보장하고 '은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대형화로 가다 보니까 거기에 맞춰 규제를 풀어줬다.
규제를 강화할 시점에 규제를 풀어준 것이 감독 실패와 제도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저축은행은 지역밀착형 서민금융기관으로 가야 하는데 대형화 자체에 문제가 많았다. 지역밀착형보다는 수도권 계열화가 많이 됐고 그러면서 서민금융기법 개발은 하지 않고 부동산 개발(PF) 쪽으로 많이 하면서 부실이 늘어났다.
유사 서민금융기관인 상호금융과 새마을금고 등과 경쟁해야 했다.
지금 저축은행은 지역밀착형을 토대로 한 것도 있고 예금보험공사가 갖고 있는 것도 있고 대기업 계열사도 있다. 특색에 맞게 감독해 나가는 것이 맞다.
감독체계에 대해서는 금감원의 조직과 인력을 전면 쇄신해서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 저축은행 담당 직원의 전면적인 교체와 금융회사에 추천하는 관행을 철폐했고 재산등록 대상을 종전의 2급 이상에서 4급 이상 직원으로 대폭 확대, 이제 금감원 전체 직원의 83%가 의무적인 재산등록 대상이다."
-가계부채, 특히 하우스푸어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해법이 있는가.
"하우스푸어, 가계부채 문제는 결국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다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제일 높은 수준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계부채를 줄이든지 국민소득(GDP)을 높이든지 해야 하는데 경제성장률보다 가계부채 증가율이 높지 않도록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년보다는 가계부채 증가율이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급격하게 죄면 일본처럼 될 수도 있어 완만하게 증가율을 떨어뜨리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은 가계부채 상환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나 내년 성장률도 그렇고 저금리 저성장으로 가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성장잠재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한다.
가계부채에서 제일 큰 문제는 리스크를 안고 있는 사람이 취약계층이라는 점이다. 자영업자와 저신용자, 하우스푸어가 갖고 있는 가계부채가 문제인데 그중에서도 다중채무자가 많다. 세 군데 이상 빚을 지고 있다.
주로 7등급 이하로 다중 채무자인 사람이 136만 명으로 70조원이나 된다.
다중채무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은행과 2금융권 대책을 동시에 해야 한다.
아직까지 재정을 투입할 만큼 가계부채 문제가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되고 있다. 은행 등의 손실흡수능력을 감안할 때 감내 가능한 수준이다."
-대선 과정에서 각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화두에 내세웠다. 그 핵심은 대기업 개혁에 맞춰져 있고 특히 순환출자, 금산분리 등은 감독당국의 업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간 경제발전 과정에서 누적된 양극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업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최근의 경제민주화 논의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민주화 자체는 소득분배를 개선하고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함으로써 경제주체 간 조화를 도모(헌법 제119조 제2항)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정책방향이다. 하지만 충분한 의견수렴 및 준비과정 없이 급격하게 추진될 경우 사회적 혼란과 기업경쟁력 약화 등 부작용을 수반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순환출자와 금산분리 문제를 살펴보면, 금융회사 경영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이고 금융과 산업 간의 리스크 전이를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금융회사의 경영 안정성이 약화되고 신규사업 추진 여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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