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정책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②

대부분의 '멘토'들은 구조가 이미 개인을 압살하고 있는 마당에, 개인이 결코 구조를 넘어설 수 없는 마당에, 구조에는 눈 감고 개인을 논한다. 물론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소위 '멘토'는 내재된 본성상 희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으며, '희망 판촉'의 '멘토' 시장은 그 자체로 구조의 일부분이다.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으며 따라서 충분히 절망하라고, 절망하는 것으로 인생은 충분히 설명된다고 권면할 '멘토'는 존재하지 않는다.(안치용의 '아프니까 어쩌라고' 중에서)

'당신은 교사라서 행복합니까?, 당신은 학생이어서 행복합니까?, 당신은 학부모여서 행복합니까?, 당신은 전문직이어서 행복합니까?'.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남들과 비교하기보다 과거의 나와 비교하여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와 비교하여 목표에 매진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구조가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하고 있으며,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에 만족하기보다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만족을 느끼는 데 익숙해져버렸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행복은 지속적일 수 없다. 비교우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 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오래된 고전 중에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회는 제목이 풍기는 느낌처럼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멋진' 세계이다. 배고픔과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즐겁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소비한다. 질병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늙어도 늙은 표시가 나지 않는다. 약간의 우울함이 느껴지면 '소마'(Soma)라는 약을 복용한다. 이 약을 먹으면 다시 행복해진다.

몇 년 전부터는 강의를 하면서 행복을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지금 행복한 아이가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만큼 아이들이 현재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만 행복을 강요하면서 나 스스로 행복을 '소마'처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결국 '희망 판촉'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 말이다. 행복은 오히려 현재 지독하게 불행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할 수도 있으며 진정한 행복은 불행도, 슬픔도, 고독도, 아니 그보다 더한 그 무엇도 내 삶의 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누가 물었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이런 질문은 항상 당혹스럽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감정의 흐름도 매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하다는 느낌은 언제나 순간이다. 지속적으로 그 감정을 지니고 살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위의 질문, '교사라서, 학생이어서, 학부모여서, 전문직이어서 행복하다'는 말은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에는 '매뉴얼'이 없다. 만약 행복에 매뉴얼이 있다면 그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소마'일 뿐이다.

타인에 의한 안정과 행복은 보장되지만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희망한 미래가 없는 곳,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없는 그곳에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기뻐도 행복하고, 슬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지금 내가 교사라서, 학생이어서, 학부모여서, 전문직이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선택과 희망이어야 한다. 교육은 바로 그 선택과 희망을 가르치는 길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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