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캐나다의 심리학자 도널드 헤브는 6~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한다.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교실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밖에 나가 놀도록 처벌했다. 그리고 행동을 잘하면, 상으로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학생들은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 노는 것보다 공부를 선호하게 되었으며, 전보다 더 열심히 즐겁게 공부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대체로 고정관념을 갖고 생활한다. 경험하는 그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에 따라 특정한 기대를 갖고 그 기대에 따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공부는 고통이며, 노는 것은 즐겁다는 등식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에도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이런 것은 비단 공부만이 아니다. 전형적인 예로 일(노동)이 있다. 구약에 따르면, 일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아담에게 하나님이 내린 벌이요 저주다. 이런 이야기를 내면화하여 고정관념을 형성하면, 일할 맛을 느끼기가 힘든다. 하물며 일을 통해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질 수 있을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드라마 대사가 한때 유명했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애인이 아프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마누라가 아프면 골치가 깨질 듯 아프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생동감 넘친 인간관계가 타성에 젖어들면서 어떻게 변하는지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자칫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만나는 연인의 생생한 존재감과 가사 역할의 고정관념으로 빛바랜 배우자의 존재감이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이 타성적 생활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타성적 생활의 밑바닥엔 대부분 고정관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새해 벽두를 의욕에 차서 시작했지만, 일들이 서서히 습관화되고 생각이 차츰 굳어져 버렸다. 그래서 처음엔 신선했던 경험들이 생기를 잃고 의욕도 함께 무뎌지자, 하고 싶던 일들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여겨지고 귀찮아진 경우가 많았다. 무미건조해지는 생활 속에 자신이 바싹바싹 타들어감을 곧잘 느끼곤 했다.

그러던 지난 늦가을 우연히 조르조 아감벤의 인터뷰를 읽었다. 일상의 타성과 고정관념이란 감옥 속에 갇혀 있었던 나는 탈출구를 어렴풋이나마 보았다. 그는 고린도전서에 적힌 바울의 말을 권했다. "슬퍼하는 사람은 마치 슬프지 않은 것처럼, 행복한 사람은 마치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뭔가를 사는 사람은 마치 소유하지 않을 것처럼 살라."

이 말을 공부와 일에 적용하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공부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일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헤브의 실험은 바울의 조언을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관찰하고 행동하면, 판에 박힌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으로 현실을 접하고 느끼게 된다.

교수가 아닌 것처럼 연구실의 문을 열 때, 나 혼자만의 연구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체험한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손때 묻은 책을 펼치면, 한 쪽 한 쪽에 아쉬움이 서린다. 다시는 가르칠 수 없는 듯 강의실에 들어서면, 학생들의 눈매가 마음에 와 박힌다.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할 듯 가족을 보면, 평소에 하지 못한 아빠 노릇이 뭐 그리 많은지 문득 놀란다.

주변을 보고 느끼는 경험이 달라지면 나와 주변과의 관계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탈바꿈한다. 나를 보이지 않게 가두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헤집고 나와 자신을 새롭게 변모시키면서 자기 성장의 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한 해가 저무는 황혼 녘에 서서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새해를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해본다. 나의 생활을 새롭게 보고,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를 다시 다잡아 가는 데 이 말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어렴풋이 알게는 되었지만 제대로 실천해 보지 못한 이 지혜를 행동으로 옮기면서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

이재정/대구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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