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올해를 풍미했던 유명인들의 말·말·말…

흑룡의 해인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말이 홍수를 이뤘던 한 해였다. 특히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진 해답게 정치권을 비롯해 온 나라가 정치적 담론에 휩싸였다. 대외적으로 북한 미사일 발사 성공과, 중국과 일본에서 우파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대내적으로는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지고 사건'사고들이 잇따랐다. 이런 와중에 쏟아져 나온 말들은 사람들에게 온기를 불어넣었지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때론 위트와 풍자로 시대상을 조명해 막힌 가슴을 뚫어주기도 했다.

올해를 풍미했던 유명인사들의 말과 유행어를 통해 한 해를 되돌아 봤다.

◆정치권, 막말의 진원지

올해도 어김없이 대결과 분열을 조장하는 말의 발원지는 정치권이었다. 총선'대선이 함께 치러진 데다 '안철수 현상' '진보당 사태'가 겹쳐 막말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특히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각 정당들의 폭로와 근거 없는 설(說)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오면서 국민들의 정치 불신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일부 정치인들의 말에는 독기까지 서렸다. 정당'정파 간은 물론 같은 당 경선 후보 간 각종 폭로와 흑색선전 등 내홍에 시달렸으며 이 과정에서 말은 짧아지고 격은 더 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경선후보 시절 5'16쿠데타와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대선후보 첫 TV토론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로부터 "이것만 기억하시면 된다.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다"는 막말을 듣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당내 경선과정에서도 김문수 경기도지사로부터 '만사올통'. 즉 만사가 '형통'하다가 (이제는) 올케에게 다 통한다는 말로 공격당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는 말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에서 구체적 협의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통령 후보로서도 영혼을 팔지 않았다'는 안철수 교수의 말도 인구에 회자됐다. 퇴임을 앞둔 이명박 대통령은 측근의 비리가 불거진 것과 관련해 '국민께 할 말이 없다'는 말로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는 말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다.

진보당과 나꼼수도 '어록'을 남겼다. 4월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위한 경선 과정에서 심각한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내 자체 진상조사 결과, 여러 장씩 붙은 투표지가 발견된 데 대해 김선동 의원이 "풀이 살아나서 붙었다"고 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꼼수 진행자 김용민 씨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속어와 욕설을 남발한 사실이 드러나자 "하나님이 할 욕을 하라신다"고 했다.

◆야근은 축복이다

검찰의 잇따른 추문과 내부 갈등에 국민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검 부장검사의 뇌물수수에 이어 검사의 피의자 성추문에 이어 '떡값 검사'라는 한물간 유행어가 '떡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이 후배들의 용퇴 요구를 거부하며 '그럼 너희도 나가라'고 한 말은 검찰 내분 사태를 상징하는 한마디가 됐다.

법원도 구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재판과정에서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고 말한 서울동부지법 유승관 부장판사의 말은 어르신들의 가슴에 비수가 됐다.

경제계, 관가에서도 다양한 말들이 논란을 일으켰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석채 KT 회장, 김석동 금융위원장,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 등 핵심 인물들의 한마디에는 국내외 경제계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건희 회장은 "(형인) 이맹희 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냐, 바로 내 얼굴을 못 보던 양반이라고"라고 말해 인터넷상에서 '콩가루 집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야근은 축복이다'는 말 한마디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지난 9월 출입기자단 워크숍에서 '젊은 시절 일 습관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한 이 말이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힘들어하는 노동자의 삶을 외면하고 친기업적인 언사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힘을 빼는 말들도 나왔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동산) 가격 거품이 빠지는 고통스러운 과정, 특히 '막차'를 타신 분들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우린 카피캣 아니다. 최근 우리가 디자인상도 받았고 오래전부터 준비를 많이 해왔다"며 애플과의 소송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오빤 강남스타일'

올해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쓴 말이다. 싸이를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나게 한 히트곡 '강남스타일'의 후렴구. 이 말은 해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미국 예일대가 선정한 '올해의 말'에서도 9위를 차지했다. '강남스타일'은 '홍대스타일' '대구 스타일' '전주스타일' 등 패러디 동영상의 제목에서 시작해 '나는 ○○스타일'이란 유행어를 낳았다. 케이블 채널 tvN '응답하라! 1997'이 큰 인기를 끌자 이 제목을 차용한 문구들도 쏟아져 나왔다. MBC 노조가 주최한 시민문화제의 이름이 '응답하라! MBC'였고 서울시 팟캐스트 명칭은 '응답하라! 원순 씨'였다.

올해 대중문화계는 뚜렷한 경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유행어들이 탄생했다. 인기개그 프로그램의 '~가 아니무니다'와 '궁금하면 500원' '브라우니, 물어!' 등이 인구에 회자됐다. 김민지 스피치킴 대표는 "지난해에는 사회풍자를 담은 유행어가 인기를 끌었다면 올해는 맥락 없는 개그와 말장난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멘탈붕괴'를 반영한 자기분열식 표현부터 인기 프로그램이나 히트곡에 뿌리를 둔 패러디까지 각양각색 유행어가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했다.

◆세태 비판 강도 높아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 교수신문은 이달 10~19일 전국 교수 6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28.1%(176명)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거세개탁'를 꼽았다고 보도했다. 이 말은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실린 고사성어다. 굴원이 모함으로 벼슬에서 쫓겨나 강가를 거닐며 초췌한 모습으로 시를 읊고 있는데, 고기잡이 영감이 그를 알아보고 어찌하여 그 꼴이 됐느냐고 물었다. 이에 굴원은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다"고 답한 데서 유래됐다. '거세개탁'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된 것은 위정자'지식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뜻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거세개탁'은 교수신문이 이전에 선정한 사자성어보다 세태에 대한 비판 강도가 높다. 이 신문은 지난해에는 나쁜 일을 하고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지만 소용없다는 뜻의 '엄이도종'(掩耳盜鐘), 2010년에는 진실을 숨겨두려 했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다는 뜻의 '장두노미'(藏頭露尾)를 뽑았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올해의 사자성어'에는 사회'시대적 상황이 녹아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최근 몇 년간 선택된 사자성어에는 정부와 정치권의 '불통'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의 거세개탁은 위정자에 대한 불만을 넘어 지식인들에 대한 실망까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교수신문이 새해에는 어떤 사자성어를 선정할까? 특히 내년에는 새 정부가 출범하는 만큼 경제 민주화, 민생이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가 현 정부의 과오를 답습할 경우 '올케형통'은 물론 이명박 정권 초기에 논란을 일으켰던 '고소영, 강부자'라는 말들이 이름을 바꿔 다시 등장할 수도 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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