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의료 도시입니다. '메디시티'를 내세우면서 남들은 몰라주는데 그저 혼자서 갖다 붙인 위상이 아닙니다. 100여 년 전 근대 의학(서양의학)이 대구에 처음 발을 들이기에 앞서 이미 의학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근대식 병원의 태동은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지보다 다소 늦었지만 의학전문학교가 서울'평양과 함께 대구에 들어선 이유는 일찍부터 지역민들이 의학'의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뛰어난 인재들을 의학계통으로 진출시키려는 의식이 성숙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의 대저서인 '동의보감'이 경상감영에서 두 차례(영조 29년'1753년, 순조 14년'1814년)나 간행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구가 조선 후기 민족 전통의학에서 중심지적 위상을 가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구 약령시가 번창하면서 전국 각지의 한의사와 한약상들이 적어도 일 년에 두 차례씩 대구에 모여들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동의보감의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입니다. 의술을 베푸는 의생이나 한약상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고, 인재가 모였습니다.
조선의 의술은 분명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료의 혜택은 보편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국가 의료기관이 있던 곳은 한양 도성뿐이었고, 지역민들은 온전한 의미에서 의술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민간 의료가 성행했고, 그나마 형편이 나은 집은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질병은 하늘의 뜻이었고, 귀신의 장난이었습니다.
1899년 제중원이 문을 열고, 1907년 동인의원이 근대의학을 선보이면서 대구 의료는 전환기를 맞습니다. 제중원은 개원 후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1천700여 명을 치료했고, 동인의원은 개원 이듬해 4천300여 명이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구의 근대의학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힘든 시기를 헤쳐나온 뒤 눈부신 성장을 이뤄왔습니다.
제중원을 출발점으로 본다면 대구의 근대의료는 이미 114년을 맞게 됩니다. 따라서 '100년사'는 한 세기를 넘겼음을 뜻하는 다분히 상징적 단어입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근대의료가 들어오기 전 조선을 괴롭혔던 시대상과 갖가지 질병, 초창기 근대의료의 흔적, 대학병원의 출발과 성장,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첨단의료 등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제1부 - 조선을 괴롭힌 질병들(1)
'팔도에 기아와 여역(열병)과 마마(천연두)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임진왜란의 참상)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 12년(1671년) 2월 29일을 기록한 '현종실록'의 일부다. 앞서 1월 3일 기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5천100여 명이었는데 역병이 잇따라 번져서 죽은 자가 200여 명이었다.'
◆기근과 역병, 죽음의 쌍두마차
전쟁보다 무서웠던 전염병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392년부터 1891년까지 500년 동안 전염병이 발생한 햇수는 무려 160년에 이른다. 평균 10년에 3차례 이상 전염병이 곳곳에서 창궐한 셈이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숨진 사람이 1천 명 이상인 기록만 36차례나 나온다. 한 차례 전국적 규모로 죽음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나면 고을마다 채 묻지도 못한 시체가 즐비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1699년(숙종 25년) 25만4천여 명, 1749년(영조 25년) 44만3천여 명, 1750년(영조 26년) 60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1807년 조선의 인구는 756만1천463명이었는데, 1835년의 인구는 661만5천407명으로 28년간 100만 명가량이 감소했다. 전염병과 함께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바로 기근이었다. 역병과 기근은 마치 죽음의 쌍두마차처럼 닥쳐왔다.
조선 중기에 유난히 심했다. 학자들은 소빙하기 때문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소빙하기는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서늘한 기후를 보였던 시기를 말한다. 정확한 시기를 두고 의견이 나뉘기는 하지만 가장 추웠던 시기는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였고, 1850년경부터 차츰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1670년(현종 11년)과 1671년 들이닥친 '경신(庚辛) 대기근'으로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상저온 탓에 우박과 서리, 폭설이 그칠 줄 몰랐고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가뭄은 참혹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들판이 누렇게 타버려 밀과 보리는 수확할 수조차 없었고, 물이 부족해 새로 파종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제주에서 함경까지 조선 팔도에서 전염병이 돌았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도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수시로 토악질이 해대며 며칠씩 피똥을 싸다가 눈이 희멀겋게 뒤집혀 죽어갔다.
◆경상도, 전국 8도 중 가장 극심한 피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식들을 앞서 보낸 부모들은 숨을 쉬되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병을 피해 사람들은 고향을 등졌고, 주리고 주린 나머지 인육을 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의 목숨도 질기지 못했다. 1695년에는 다시 100만 명이 굶어 죽는 '을병(乙丙) 대기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구멍 뚫린 문풍지 같았다.
경상도의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휩쓸고 지나간 경상도는 가장 피해가 혹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란에다 기근과 역병까지 겹쳤으니 그 참혹함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목숨을 잃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적군에 코를 베인 사람, 처와 누이가 능욕당한 사람, 동족에게 참수급제(斬首及第: 적의 머리 하나를 베어 오면 과거 보기를 허락한 것. 이 제도가 생긴 뒤 굶주린 백성들이 더욱 목숨을 잃었음. 동족의 머리를 깎아 왜놈의 머리라고 속여 바치는 일까지 벌어졌음)의 희생자까지 있었으니 이러한 참변은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초근목피로도 연명되지 않아 나중에는 인상식(人相食: 흉년에 너무 배가 고파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음)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모여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들판에 가득 찰 지경이었다. 경상도에는 한 줌의 곡식도 남아있지 않다'는 기록도 있다.
전란이 끝난 뒤의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다. 1973년 발간된 '대구시사' 제1권에는 '경상도의 질병과 피해상황'이 소개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질병 기록 중 경상도 부분을 일부 발췌한 것. 현종 12년 질병이 크게 번져 5월에 590명, 7월에 무려 2천692명이 숨진 것으로 나와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던지 아예 물음표로 해 놓았다.
숙종 43~45년(1717~1719년)에는 한 해에도 수차례 역병이 돌았다. 2천여 명이 병을 앓았다고 기록돼 있고, 수백 명 이상 목숨을 잃었다. 1718년 4월에는 사망자가 2천387명에 달했다. 이 한 해에만 3천100여 명이 숨졌다.
◆보편적 의료혜택은 찾기 어려워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는 697만7천여 명(1721년), 경상도 인구는 162만8천여 명(1717년), 대구부 인구는 6만8천여 명(1720년)으로 나와 있다. 대구시사는 '현종, 숙종 양대에 있어 전염병의 감염률과 사망률이 매우 컸다. 전염병 예방이나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의학생의 지식, 기술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실정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기록했다.
의술의 발달과 보편적 의료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간 것은 아니었다. 앞서 기록처럼 전염병에 대해 당시 의학은 무기력했지만 나름대로 우리 체질에 맞춘 의학서가 잇따라 발간되고, 일반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실용 의학서의 보급도 이뤄졌다. 하지만 그 역시 일부 지역과 지배층에 국한된 것일 뿐 보편적인 의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구시사는 적나라한 표현으로 이를 기록했다.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들이 그것을 타개하려고 노력한 흔적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군주와 관료 지배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재난을 당해 직접 고통을 받는 것은 언제나 하층의 피지배 계급이었고, 지배층에게 피해가 미치는 일은 드물었다. 재난으로 인한 국고수입의 멸소가 그들이 받는 간접적인 피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기에 구제책이라는 것이 거의 언제나 미봉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질병에 관한 한 의학기술이 미숙했던 당시에 어떤 구체적인 구급책을 기대하기도 힘들고, 실제로 그러한 대책이 강구된 자취도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근과 역병으로 죽어나간 시신이 길가에 즐비하다는 보고를 받은 임금의 탄식 장면이 곧잘 나온다. 하지만 탄식에 그칠 뿐 고작 시신을 수습하라는 어명 외에는 대책조차 없었다. 콧물만 흘러도 병원으로 달려갈 만큼 의료가 보편화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부터다. 다음 회에는 '조선의 의료정책과 민간 의료'에 대해 알아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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