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잠시 멈춤

우리 동네 지상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 나 있다. 허공의 길을 따라 날개를 활짝 펼친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오고 간다. 굉음은 비행기를 따라 지상으로 낮게 이륙하며 천지를 흔들어 놓고서야 사라진다. 동네 어귀에는 비행장 이전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오래전부터 펄럭이고 있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의 공약은 비행장 이전에 초점을 맞추지만 매번 공허한 메아리처럼 끝을 맺지 못했다.

비행기 소리는 어떤 배려심도 없다. 연인들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도, 노동자들의 소금기 서린 고단한 잠도, 갓난아기들의 달콤한 꿈나라 여행도 방해할 만큼 심술궂다. 해를 거듭하며 동네 사람들은 인생의 심오한 깊이라도 터득한 것일까. 피켓 시위도 서슴지 않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낮아지고, 쇠를 부대끼며 억세게 뿜어져 나오던 비행기 소리는 삶의 일부처럼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언제부턴가 비행기 소리에 대처하는 행동 법칙이 생겼다. 그것은 '멈춤'이었다. 대화 중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춤'이라는 말 없는 룰이 적용된다. 이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 시간에도 비행기가 뜨면 잠시 수업을 중단한다. 순간, 선생님은 칠판에서 눈을 떼고 잠깐 숨을 고른다. 아이들은 비행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턱을 고이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창공을 거침없이 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나의 꿈도 비행기처럼 거침없이 치솟아 세상 곳곳에 펼쳐지기를 상상하지 않을까. 이렇게 우리는 '잠시 멈춤'의 미학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비행기 소리는 삶의 쉼표였는지도 모른다.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움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친 전쟁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쉬게 하는 고마운 중재자다. 시장 소상인들의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중단케도 하고, 때로는 정신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바쁜 걸음을 멈추어 하늘을 보게도 한다. 소리에는 갈등도, 전쟁도 잠시 멈추고 생각하라는 무언의 법칙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행기 소리는 요동하는 배처럼 흔들리며 살아가는 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다. 땀에 흠뻑 젖어 초췌해진 내 이마에 한 줄 실바람으로 다가와 땀을 식혀주는 여유의 부표로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의 멈춤 없는 가속도를 제어해 저속 기어로 변환해내는 고마운 쉼표의 존재. 천천히, 내가 온 길을 돌아보게도 하고, 좌우 고개 돌려 주변을 다시금 정리하게 하는 아름다운 방해꾼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탈무드에는 '인간은 가끔 일에서 손을 뗌으로써 오히려 더 큰 것을 얻는다'는 심오한 가르침이 있다. 또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이따금 그림에서 손을 떼고 화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세상에는 열 가지 다 좋은 것도 없고, 열 가지 다 나쁜 것도 없다. 맑은 하늘에 먼지가 날리고 시궁창에도 꽃이 피기 마련이다. 이 시끄러움에 완벽한 정이 깃들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 때문에 불행하지는 않다. 사건보다 해석이라고 했다. 이 시끄러움조차 또 다른 여유로 받아들이다 보면 팍팍한 세상 귀퉁이에서 옥석을 얻는 여유를 배울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다. '신이여!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저 높은 하늘의 문제를 푸는 법은 내 마음에서부터다. 어쩌면 고요를 방해하는 것이 비행기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온갖 탐욕과 잡념이 얼마나 들끓어 오르는지. 알고 보니 바깥이 아니라 내 안의 소음에 휩싸여 살아가는 자신이 곧 시끄러움의 덩어리였다.

새해가 밝았다. 분명한 것은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내 안에서 먼저 초환경적인 평화를 구축하자.

뿌우앙~동네를 흔들며 비행기가 지나간다. 잠시 쉬어야겠다.

이상렬/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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