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외계

# 외계 -김경주(1974∼)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 그리는 화가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중앙,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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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하루에 한 번씩 뜨는 해지만 새해의 해는 각별하다. 하루의 해는 하루의 의미를 되새기듯 한 해의 새 해는 한 해의 의미를 아로새긴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그대는 무슨 희망을 새해에 그려 넣었는가. 어떤 부재를 무엇으로 채우려는가.

이 시는 이 세상에 팔을 가져 오지 못한 어떤 구족화가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그의 팔을 볼 수 없듯이 그의 그림도 알아볼 수 없다. 시인은 다르다. 화가의 팔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저기' 있다고 억지를 부린다. 간곡한 위로다.

이 세상도 생겨난 것이 맞다면 어딘가에는 자궁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화가의 두 팔처럼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혹시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들이 아닐까. 희망이라든지 사랑, 평화 따위 말이다. 잘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해에도 가쁜 호흡으로 그려보자. 붓, 이 악물고.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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