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버리는 작품은 없는데…

"그림 그리다 버리는 것 있으면 하나 주면 안 되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누군가로부터의 이런 주문에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몰라 약간은 당황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 막역한 이들과 사적 자리를 하다 보면 그리다가 실패한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는 작품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해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잘못되거나 맘에 들지 않는 그림을 버리지 말고 하나 달라고 선물을 강요한다. 또 어떤 이는 완성되는 모든 그림의 가치가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말을 이어 간다. 또 화가는 붓만 들고 있으면 아무런 고민과 고통 없이 그림이 알아서 그냥 그려지는 것처럼 너무 쉽게 말한다.

물론 대다수는 진심이 아니라 서로의 정을 두터이 하고 대화의 끈을 이어가려는 속내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작은 그릇 탓인지 금방 순발력 있게 기분 좋은 웃음으로 넘길 재치가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곤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군가의 화실에는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화가들의 작품은 서로 등짝을 붙이고 포개져 화실 벽면에 무겁게 기대어 작업에 미친 주인과 고독을 같이 나누고 있다. 또 일부는 창고에 쌓여 시간의 먼지를 하나씩 덮어쓰면서 기약 없는 감옥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화가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실패한 작품은 그 위에 다른 그림으로 덧칠되어 다시 태어나거나 칼로 그어지고 새 천으로 입혀져 재생되기도 한다.

많은 화가들이 경제적 여건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 이로 인해 작업을 포기하고 붓을 놓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작품을 팔아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작품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작가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돈과 관련해서는 어색해한다.

일반적으로 작품 활동을 위해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작업실 공간이다.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확보되고 있다. 물론 화가 소유의 공간이 따로 있거나 비교적 편리한 환경을 누리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 화가들은 남의 건물에 입주해 세를 부담하기 위해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화실을 운영하기도 한다. 냉'난방비 등 이런저런 시설과 관리비도 해결해야 한다.

그 외에도 물감, 붓, 캔버스, 액자 등 일상적인 재료만 해도 많은 양이 필요하다. 인심 좋은 화방 사장님의 배려로 몇 달을 그냥 날라다 쓰다 보면 순식간에 감당하기 힘든 액수가 된다. 그림이 잘나가든 그렇지 않든 다작을 하는 화가일수록 활동에 비례해 경제적 부담은 커지기 마련이다. 작품의 가치가 경제적 수치로만 계산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어쨌든 화가도 현실에 살고 있다.

이제야 그 대답이 생각났다. "너는 돈 쓰다가 버리는 것 있으면 좀 주면 안 되나?"

김윤종<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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