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부친상으로 서울진공작전 포기한 이인영

'각 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타서 근기(近畿)에 범입(犯入)하면 천하를 들어 우리의 가물(家物)이 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의 해결에 유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유생들에게 집상(執喪'어버이 상 때 상제 노릇 하는 일)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운명을 눈앞에 둔 의병대장 이인영(李麟榮'1868~1909)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을사늑약(1905), 고종 황제 강제퇴위 및 군대 해산(1907) 등 일제가 시시각각 조선을 삼키려 할 즈음 그 야욕 분쇄를 위해 그는 1907년 11월 서울을 향해 경기지방으로 진군하자는 격문을 전국에 보내 의병을 촉구했다.

그렇게 모인 1만여 명 의병으로 13도 창의대진소 연합의병부대가 꾸려졌고 총대장이 됐다. 그러나 1908년 오늘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전권을 허위(許蔿)에게 물려주고 문경으로 내려가 부친상을 치르고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해 있던 선발 허위 부대는 후발 본대 도착 전에 우수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에 패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좌절됐다. 후일을 노렸던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일본헌병에 체포돼 그해 9월 20일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정인열<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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