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는 비록 의생(醫生)이 있다 해도 숫자만 채울 뿐이고, 심약이 있다 해도 어찌 사람마다 구제받을 수 있겠습니까? 빈궁한 마을의 백성들이 뜻밖의 질병에 걸리면 심하게 괴로워하는 상황을 귀와 눈으로는 차마 보고 듣지 못할 것입니다. 현마다 1인, 군마다 2인, 도호부마다 3인씩 전의감(典醫監)에 소속시켜 1년이나 3년간 의서를 읽고 의술을 배우게 하고, (중략) 우리나라 약재를 사용해 백성을 구해 성과가 있는 자는 자급을 더하고, 감사로 하여금 칭찬과 나무람을 하게 하소서."
◆지역별로 심약 배치
1469년 6월 29일 공조판서 양성지는 예종에게 올린 국정 전반에 관한 상소 중 일부분이다. 양성지는 앞서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고 부를 정도 총애했고, 개혁 군주인 정조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상소 중에 각 지역에 의사를 보내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심약(審藥)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심약은 조선시대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사하기 위해 각 도에 파견된 종9품 벼슬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방 공공의료가 워낙 부실한 상황이다 보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심약을 따로 배치할 것을 간청한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에 이를 때까지는 심약의 역할에 대한 중앙정부의 기대가 사뭇 컸다. 이런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9대 왕인 성종은 1485년 1월 13일 "우의정 홍응이 먼 지방에 내려가는데 기침병을 심하게 앓고 있으니 의원 한 사람을 데려가도록 하라"고 하교한다. 그러자 홍응은 "종사관(從事官)이 있는데, 또 의원을 데려가면 반드시 번거로움을 이룰 것입니다. 하물며 그 도(道)에도 심약이 있어서 치료할 수 있으니, 데려갈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사양했다.
◆지방 공공의료 책임져
필요한 약재를 구하는 데 있어서도 심약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성종 20년(1489년) 6월 7일 실록에는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진상하는 약재의 채취에 착오가 없도록 지시하는 내용이 남아있다. 지방관의 지시를 받아 약재 채취를 감시'감독하는 것이 바로 심약이다. 제대로 된 약재를 진상하지 못할 경우, 심약에게 엄중한 죄를 묻기도 했다.
"(약은) 비록 수량의 작은 차이가 있더라도 능히 사람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하물며 참된 약이 아닌 것을 채취해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지난봄에 향약을 뒤뜰에 심으려고 각 도에 채취해 올리게 했는데, 경상도 심약 김우연이 진짜 자완(紫莞: 폐와 기관지에 쓰이는 약재)이 아닌 것을 채취해 올렸으므로 중죄를 물어 직을 파하였고, 약을 채취한 고을의 수령에게도 죄상을 묻고 따졌다. 무릇 진상하는 약재는 거두어 햇볕에 말리는 일을 의약서에 따라 착오가 없게 하라."
성종은 유난히 우리 약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5년 뒤인 1494년 관찰사들에게 약재를 월령에 따라 맞게 채취하라는 명을 내렸다. 따르지 않으면 심약뿐만 아니라 지방관들도 벌을 면치 못한다고 경고했다.
심약은 약재를 다룰 뿐 아니라 지방 의료의 최일선에 있었다. 연산군 3년(1497년) 9월 24일 황해도에 괴질이 돌아 방역책을 의논하는 가운데 대신들은 심약들이 순회하면서 병든 자를 치료토록 할 것을 간청한다.
"급히 심약을 선택해서 보내되, 약방문을 아는 의생(醫生)들이 심약에게 구호(救護)하는 방법을 가르친 뒤에 여러 고을로 나눠 보내고, 이들로 하여금 돌아다니며 치료하게 해서, 효과를 나타낸 자에게는 상을 주고, 제대로 구료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를 지우며, 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수령들도 엄중히 따지게 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주요 약재 진상시에 농간 부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며 심약을 둘러싼 폐단들이 속속 보고된다. 광해군 15년(1623년) 2월 4일 궁중 의료기관인 전의감 책임자가 뇌물을 바치고 심약이 되는 폐단에 대해 보고를 올린다.
"요즘 의적(醫籍)에 이름도 없는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사소한 물품을 도감에 바치고 심약으로 차출되기를 청하고 있는데 (그 폐단이 이미 고질처럼 됐습니다.) 의관들이 (살아갈 길이 없으므로) 모두가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의술이 끊어지려 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정조대에 이르러 심약이 저지르는 패악은 극에 달한다. 특히 녹용을 진상하는 문제에 대해 심지어 영의정과 우의정까지 나서서 대책 마련을 간청할 정도다.
정조 8년(1784년) 윤 3월 10일 영의정 정존겸은 "약원에서 녹용을 올릴 때 애당초 한 대(對)마다 4냥쭝을 표준으로 삼는 규정이 없으며, 4냥쭝을 표준으로 삼는 것은 틀림없이 심약의 무리들이 조종하고 농간을 부리는 데서 이뤄진 것입니다"라고 아뢴다.
정조 13년(1789년) 8월 6일 우의정 채제공은 "지난해 녹용 한 대(對)의 값을 80냥으로 정했는데 요즘에는 400~500냥이나 된다고 합니다. 모두가 심약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이런 보고를 들은 정조는 격분한다. 알맹이만 추려서 보면 이렇다. "공납하는 녹용의 폐단을 해결하는 방안 때문에 벌써 수차례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지금 와서 한 대에 수백 냥 한다는 설이 한 술 더 떠 600금이나 된다니, 나라에 기강이 없고 법이 없는 것이다. 법이 없는 나라에 도백(道伯)과 수령을 둔들 무엇에 쓰겠는가."
◆영남의 6가지 폐단 중 하나
정조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임금은 약재 하나를 공납하는 문제를 두고 이처럼 폐단이 많고 부조리가 심각한 데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던 모양이다. 정조가 내린 경고문은 서릿발 같아서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폐단이라는 두 글자가 또 내 귀에 들릴 경우 일의 곡절을 불문하고, 북쪽의 감사와 병사는 모두 가장 먼 육진(六鎭) 땅에 연한을 정하지 않은 채 정배할 것이며, 간교한 짓을 한 심약은 죽지 않을 만큼 곤장 50도를 친 후 백성들에게 돌려 보일 것이며, 예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잡아들여 실정을 알아낸 후 곧 그곳에 정배시키도록 하라. 만약 내년 봄부터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거나 대충 일을 마무리했더라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성한 몸으로 다시 조정의 반열에 서고 싶거든 먼저 이 일부터 마음을 다해 시행토록 하라." 단지 심약뿐 아니라 지방관들에 대한 엄중 경고인 셈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심약의 폐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함경도 삼수와 갑산 두 고을의 녹용과 사향을 공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심약이 제 마음대로 값을 조종하는 패악을 부린 탓에 주민 태반이 고향을 떠났다는 보고까지 올라온다. 연일 현감 정만석은 영남의 여섯 가지 폐단 중에 하나로 삼폐(蔘弊), 즉 산에서 캔 삼을 공납하는 과정의 비리에 대해 보고한다.
산에서 캔 삼이 귀하다 보니 각 읍마다 삼 장사꾼에게 사서 공납하는데, 일부 삼 장사꾼들이 심약에게 아부를 해서 자기들이 판 것이 아니면 바로 퇴짜를 놓게 한다는 것. 이처럼 삼을 독점 공급하는 삼 장사꾼들은 가격도 터무니없이 높이 받아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대해 비변사는 심약도 엄벌하고, 이를 덮어준 수령도 똑같이 죄를 묻겠다고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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