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때 귀족 기사들이 입었던 판금 갑옷은 평민 병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비싸기도 했거니와 엄청나게 무거웠기 때문이다. 판금 갑옷의 무게는 평균 40㎏이 넘었고 방패와 칼, 창을 더하면 최대 70㎏까지 나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귀족 기사들은 혼자서 말에 오를 수 없었고,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그래서 16세기 독일 농민반란 때 전투 중 실수로 넘어진 기사들은 판금 갑옷의 취약점인 겨드랑이나 목덜미에 칼을 찔러넣는 농민군에게 처참하게 '도살'됐다고 한다) 귀족 기사들이 전쟁터에도 종자(從者)를 데리고 다닌 이유의 하나다. 잘 먹지 못해 귀족보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했던 평민들이 판금 갑옷을 거저 줘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
이 같은 귀족과 평민의 신체적 차이는 'look down on'(낮춰보다, 얕보다)이란 영어 숙어의 유래에도 스며 있다. 19세기 초 영국군 장교들은 사병보다 평균 키가 매우 컸다. 머리 하나는 컸다고 하니 30㎝ 이상은 됐던 듯하다. 이 때문에 장교가 사병을 내려다보지 않으려 해도 내려다볼 수밖에 없다. 키 차이에서 비롯된 사실의 표현이 신분상의 우월감과 합쳐져 '얕보다'라는 경멸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귀족과 평민, 장교와 사병의 이런 평균적인 신체적 차이는 유전자보다는 성장기에 잘 먹었는지 여부에 달린 것 같다. 또래 남한 아이들보다 왜소한 탈북 청소년의 몸이 이를 잘 뒷받침한다. 잘 먹고 못 먹고에 따라 키와 체중이 차이가 나는 것은 체제의 성패(成敗) 때문만도 아니다. 남한에서도 못사는 집 아이들은 잘사는 집 아이보다 왜소하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빈곤 계층 아동의 키와 체중은 평균보다 낮았다.
하지만 한국의 고위 공직자 자녀는 예외인 것 같다. 허약해 병역을 면제받은 경우가 흔해도 너무 흔하다. 고위 공직자 아들 아니랄까 봐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아들도 체중 미달과 질병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만만치 않은 재력을 가진 판사 아버지 덕에 남들보다 잘 먹고 컸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고위 공직자 자녀에게는 징병검사 때에만 발현되는 '병약(病弱) 유전자'가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건강한 신체 때문에 꼼짝없이 현역 판정을 받은 아들들이 나를 왜 이렇게 건장하게 키웠느냐고 아비들을 원망하면 우린 뭐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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