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집안 문제로 부산을 다녀왔다.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면 했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결국 혼자서 외사촌 동생과 큰누나를 따로 만나고 돌아왔다. 토요일인데도 한파 탓인지 기차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는 젊은 내외의 작은 소리도 기차가 출발하자 잦아들었다. 아기가 잠든 탓이리라.
초등학교 삼 학년 쯤이었을까? 외삼촌은 독일로 돈을 벌러 떠났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겨우 100일을 넘긴 아들을 두고 떠나는 길이었다. 가난 때문에 하나뿐인 아들을 광부로 보내야 했던 외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외삼촌은 독일을 떠나 스페인이라는 낯선 나라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외숙모는 가난과 외로움을 못 견디고 집을 나간 후였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마치 혈육이라곤 하나밖에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친손자를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결혼에 실패해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큰 딸인 어머니에게도 월세를 받았다. 외할머니는 당신의 외손녀와 외손자가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출가외인'을 거론했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 어머니는 세 아이를 끌어안고 서럽고 긴 겨울밤을 보내야만 했다.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이십 년 만에 외삼촌이 잠깐 귀국했을 때, 외사촌 동생은 쉽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 절대적 빈곤이 만든 이십여 년의 세월은 결국 부자지간의 인연조차도 그렇게 서먹하게 만들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결혼한 아들을 보고자 외삼촌은 몇 번 한국을 다녀가셨지만 부자간의 정은 그렇게 원만하게 복구되지 않았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은 대화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며칠 전, 스페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불어 닥친 경제 위기는 결국 제일 먼저 이민자들에게 칼날을 겨누었고 삼촌도 피해갈 수 없었다. "할머니 집을 팔아야겠어." 긴 침묵이 흘렀다. 스페인과 아들이 살고있는 나라를 저울질하던 외삼촌이 선택한 결론이었다. "형! 난 아버지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어."외사촌 동생은 말했다. 커피 잔을 매만지며 담담하게 내뱉는 동생의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오랫동안 못난 형을 대신해 고모인 어머니를 돌보아 주었던 친동생 같은 외사촌 동생이었다. "형! 난 내 아이에게 그냥 따뜻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 집사람에게도."
자라면서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는 풍경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누군가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말할 때, 가난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모르고 하는 말장난이라고 욕하고 싶었던 날들은 또 얼마였던가?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큰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세월이 흘러가네. 흰머리가 늘어가네/모두 다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다시 못 올 그 먼 길을/어찌 혼자 가려 하오/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 마디 말이 없소/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어느 60대 부부 이야기 가사 전문)
그랬다. 유달리 동생은 처가를 위했다. 농번기나 명절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처가를 다니러 가는 동생을 두고 친척들은 못마땅해했지만 아들에게 화목함을 보여주고 싶다는 동생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왜 동생의 애창곡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열 쌍의 부부 중에 얼마가 이혼한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혼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가정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는 희망이 없는 사회다. 긴 시간 우리가 자랐던 할머니의 집을 지키는 문제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설령 그것이 아픈 기억이었다 할지라도 그나마 우리를 지켜주었던 작은 울타리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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