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아닌 평화의 시대에도 '밀리터리'(군사) 문화는 각광받는다. 파괴와 살육이 아닌 취향과 실용의 목적으로 말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승리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개발한 기술적 요소들은 우리 일상에 다양하게 적용되며 편리함과 이로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사실 성인 남성 대부분이 군 생활을 경험하는 우리나라에서 밀리터리 문화는 '추억'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군복 '개구리 무늬'의 비밀은?
지난가을부터 최근까지 패션계를 휩쓸고 있는 무늬가 있다. '카모플라쥬'(camouflage) 무늬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로 일명 '개구리 무늬'가 있다. 군복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늬다.
카모플라쥬의 유래는 동물들의 보호색과 위장 무늬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색과 무늬를 지니게 됐다. 카멜레온의 색 변화, 표범의 호피 무늬, 얼룩말의 얼룩무늬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가장 먼저 주목해 차용한 것이 바로 군복이다. 군사작전 등에서 은폐와 위장이 곧 병사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물론 작전의 성공과 연결된다고 봤기 때문.
그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19세기 이전 서양에서 벌어진 전쟁은 주로 백병전이었다. 적과 아군을 쉽게 식별하려면 화려한 색상의 군복을 갖춰야 했다. 또 병력 숫자를 과장하고 상대에게 심리적 위축감을 주기 위해 원색 계열의 군복을 선택했다. 운동선수들이 원색 유니폼을 선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후 전쟁 양상이 변화하면서 군복 색상도 점차 단순해지게 된다.
그러다 카모플라쥬 무늬가 군복 디자인에 도입된 것은 베트남전쟁 때다. 미군은 정글이 많은 베트남의 자연환경에 맞춰 은폐와 위장에 용이한 군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연한 녹색'진녹색'갈색'검정 등 네 가지 색을 사용한 '우드랜드' 무늬를 개발해 군복 디자인에 적용했다.
이후 군복에 쓰이는 카모플라쥬 무늬는 각 지역 자연환경에 맞춰 다양하게 개발됐다. 침엽수가 많은지 활엽수가 많은 지에 따라 그 나라 군복의 우드랜드 무늬는 조금씩 달라진다. 사막에서 활동하는 미군의 군복 디자인에는 갈색 계열 색상이 섞인 데저트(사막) 무늬가 들어간다.
우리나라도 기존 개구리 무늬를 최근 개선했다. 2011년 10월부터 전 군에 보급하고 있는 신형전투복 디자인에 적용한 '화강암 무늬'다. 흙'침엽수'수풀'나무줄기'목탄 등 우리나라 자연환경에서 가장 흔한 다섯 가지 색상을 섞어 만든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픽셀 패턴을 적용해 은폐와 위장 효과를 더욱 높였다.
◆밀리터리 룩 유행
다양한 카모플라쥬 무늬가 일상 속 밀리터리 룩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워낙 무늬가 다양하고 변용할 여지도 커서 그만큼 패션 디자인에 다채롭게 녹아들고 있는 것.
29일 찾은 대구 동성로 구제 골목. 녹색 계열의 야상(야전상의)을 밖에 걸어놓은 가게가 많았다. 주력 제품이라는 의미다. 한 가게 주인은 "매년 가을'겨울에 버버리 코트를 밖에 걸어놓았는데 올해는 야상이 유행해서 바꿨다"고 했다. 캐주얼 브랜드 옷가게들도 쇼윈도 마네킹에 다양한 디자인의 야상을 입혀놓은 모습이었다. 가을에는 두께가 얇은 셔츠형 야상 제품이, 겨울에는 보온을 위해 기무나 패딩 소재를 가미한 야상 제품이 인기란다. 대학생 박모(26'여) 씨는 "야상 특유 빈티지(구식) 느낌의 카키 색상이 다른 패션 아이템을 잘 받쳐준다. 블랙과 네이비 색상이 그런 역할을 했는데 지루한 감이 있고, 요즘은 카키가 대세다. 그리고 야상은 때가 타도 티가 잘 안나 편하게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카모플라쥬 무늬만이 밀리터리 룩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1'2차 세계대전 등 전쟁을 여럿 겪은 지난 세기에 탄생한 밀리터리 룩은 요즘의 현대 패션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에서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기존 화려한 장식은 없애고, 직선적인 실루엣에 단순한 주머니'단추 등 실용적인 디자인을 의복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 밀리터리 룩의 시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밀리터리 룩은 실용성만 강조한 군복이나 작업복으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최근 인기를 얻으면서 젊은이들이 즐겨 입고 있고, 30, 40대의 경우 레저용 패션으로도 많이 찾고 있다.
◆밀리터리 생활용품 인기
군용품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특유의 휴대성과 첨단 군사기술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투식량이 대표적이다. 군인들이 바깥에서 훈련할 때나 먹던 '휴대용 짬밥'이 레저'재난 대비'추억 맛보기 등의 용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군대에만 납품되던 전투식량이 민간에 출시된 것은 2003년쯤부터다. 당시 납품하지 못한 재고를 시중에 판매한 것이 점차 인기를 얻은 것이다. 현재 판매업체만 40여 개에 달할 정도. 그러면서 메뉴도 기존 레토르트 제품 수준으로 다양해졌다. '3분 카레'류 레토르트 제품과 전투식량이 다른 점은 첨단 군사기술이다. 줄만 잡아당기면 온도가 순식간에 올라 자동 조리되는 등 낚시나 등산과 같은 레저 활동에 안성맞춤이라는 것. 상온에서 2년 여까지 보관할 수 있는 특징은 2010년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때 재난 대비 비상식량 용도의 깜짝 매출로도 이어졌다.
최근 일반적인 추위가 아닌 '혹한'이 지속되면서 군용 방한용품도 깜짝 히트를 쳤다. 군대에서 혹한을 경험한 20~40대 남성들이 깔깔이를 비롯해 내복'장갑'핫팩 등을 많이 찾았다. 한 군인용품 전문쇼핑몰은 현역 군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최근 방한용품을 많이 찾으면서 지난해 대비 2배 이상 매출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예비역 8년차 직장인 구모(31) 씨는 "재난이나 혹한 등 비상시에는 민간용품보다 군용품이 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예비역들 사이에 은근히 있다"고 했다.
첨단 군사기술이 적용된 민간용품으로는 최근 대중화된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대표적이다. 내비게이션은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위성의 신호를 받아 위치를 측정한다. 그런데 GPS 위성은 군사목적으로 미국 등에서 1970년대부터 쏘아 올린 것이다. 그러다 냉전 체제가 무너진 이후 GPS 위성이 민간에 개방됐고, 내비게이션도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관련 업계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차량용 내비게이션의 국내 시장 규모는 6천억원대이고, 작동 중인 내비게이션 제품은 약 240만 대다.
밀리터리 생활용품이 인기를 얻으려면 먼저 군대 안에서 군용품의 성능이 개선돼야 한다. 곧 첨단 군사기술의 수혜를 민간에서도 맛볼 수 있을 전망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2020년쯤 첨단 방탄헬멧'영상송신장치'GPS'군복 자동 온도조절 시스템 등을 전 군에 보급할 계획이다.
◆대중 속 파고드는 밀리터리 문화
밀리터리 문화를 즐기는 마니아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마니아들만 즐기던 문화가 대중적으로 퍼지고 있는 모습이다.
밀리터리 마니아 문화의 고전은 전투기'탱크'항공모함 등의 모형 제품 수집이다. 국내 모형 제작 기업인 '아카데미'의 제품들이 대표적이다. 업체 관계자는 "점점 높아지는 마니아들의 수준에 맞춰 완성도 높은 모형 제품을 내놔야 하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역사적 고증 작업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밀리터리 마니아들은 전문 군사지식에도 큰 관심을 쏟는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관련 커뮤니티가 꽤 활성화돼 있다. 국가별 군사 무기의 성능을 비교'분석하고, 가상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 등이다. 정부에서는 현역 군인이나 군사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지녔다며 이들을 전문자문단으로 대우할 정도다. 지난해 3월 방위사업청은 미래 전장을 대비하는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취지로 간담회를 열고 밀리터리 마니아들로부터 제언을 듣기도 했다.
온라인 게임 업계에서는 일인칭 슈팅게임이 대세다. 게임 개발 업체마다 앞다퉈 서비스하고 있다. 기존 군 무기 체제를 그대로 차용해 게임으로 구현한 것으로 서바이벌 게임을 온라인에 옮겨 놓았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 대학생 및 20, 30대 예비역들에게 인기다. 넥슨의 '서든어택'은 인기 가수 미쓰에이의 수지를 게임 속 캐릭터로 등장시킬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러면서 일인칭 슈팅게임은 세계에서 '게임 한류'를 이끄는 콘텐츠로도 각광받고 있다. 스마일게이트의 '크로스파이어'는 중국에서 지난해 1조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나 내놓던 블록버스터 밀리터리 영화도 국내에서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개봉한 '알투비:리턴 투 베이스'가 대표적이다. 극 중에서는 공군 21전투비행단 소속 F-15K 전투기들이 서울 도심에서 공중전을 펼치는 등 역동적인 영상을 펼쳐보였다. 신영균과 최무룡이 출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1964)에서 전투기 조종석만 비추던 심심한 공중전 장면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군사기술도, 그것을 문화로 구현하는 기술도 함께 진화하며 밀리터리 문화는 점점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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