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식민지 어둠의 등불, 박향림(하)

코믹송 '오빠는 풍각쟁이' 인기…꽃다운 나이에 숨져

그해(1937년) 가을 박억별(박향림의 아명)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 오케레코드사를 찾아갔지만 이철 사장은 더욱 냉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른 억별은 곧바로 태평레코드사를 찾아가서 오디션을 받고 즉시 전속으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16세의 소녀 가수였던 것이지요.

박억별은 '청춘극장'과 '서커스 걸'이란 노래를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 선생으로부터 받아 첫 데뷔음반을 발표했습니다. 그녀의 창법과 음색에는 풍부한 성량에다 무언가 답답한 속을 확 트이게 하는 힘이 있었으므로 나오자마자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때 음반에 표시된 이름은 박정림(朴庭林)이었습니다. 여러 곡이 히트하게 되자 박억별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전격 발탁됩니다. 이때부터 박억별은 박정림을 거쳐 박향림이란 예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무렵에 많은 노래들을 취입했었는데 가장 히트했던 노래로는 단연코 '오빠는 풍각쟁이'를 손꼽을 수 있겠지요. 소녀 가수 박향림의 간드러진 콧소리로 들려오는 이 노래는 무엇보다도 가사의 내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만요풍 코믹송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노래 가사에 떡볶이, 오이지, 콩나물 등의 음식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나 제나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여동생을 괴롭히는 짓궂은 오빠를 '풍각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각쟁이는 원래 시장이나 집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노래가사에서는 심술쟁이 오빠에 대신하는 말입니다. 지금은 국립극장으로 바뀐 옛날의 명치좌(明治座)도 등장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모주꾼, 안달쟁이, 대포쟁이란 어휘들도 정겹습니다. 모주꾼은 모주망태, 혹은 모주쟁이란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술을 너무 분별없이 많이 마셔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안달쟁이는 지나치게 마음을 졸이며 필요 이상으로 조바심을 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포쟁이란 말은 입만 열면 허풍과 거짓말을 요란스레 늘어놓는 사람을 비꼬는 말입니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는 온통 박향림 노래에 대한 찬사 일색이었습니다. 박향림의 인기가 워낙 높아지니까 너무도 당황한 곳은 지난날 박향림을 거절했던 오케레코드사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가수들은 모조리 오케레코드사로 집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욕심쟁이 이철 사장은 박향림을 기어이 오케로 이적시키고야 말았습니다.

박향림이 오케레코드로 옮겨와서 첫 취입곡으로 발표한 작품은 그 유명한 '코스모스 탄식'입니다. 이후로 발표하는 음반마다 히트가 이어지자 이철 사장은 흐뭇했습니다. 그렇게도 서울로 진출하여 훌륭한 가수가 되고 싶었던 박향림은 당대 최고의 조선악극단 중심 멤버로서, 그리고 대중들의 우상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드디어 해방이 되고 박향림은 악극단 공연에 참가하여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힘겨웠던 식민지 시대를 잘 견디었던 우리 겨레를 위하여 어떤 위로라도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46년 박향림은 혼인을 했고, 배부른 몸으로 공연무대에 올랐습니다. 출산을 했지만 제대로 산후조리를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던 박향림에게 힘겨운 지방공연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회복이 덜 된 몸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공연 무대에 올랐던 박향림은 마침내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산욕열(産褥熱)이란 병이 박향림의 목숨을 기어이 앗아 갔습니다. 세상을 하직하던 시기가 불과 스물다섯. 꽃다운 청춘으로 돌연히 이승을 하직한 박향림을 잃고 가요계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1946년 7월, 박향림 추도공연이 서울 동양극장에서 열렸습니다. 공연의 이름은 '사랑보다 더한 사랑'이었고, 박향림을 너무도 아꼈던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출신의 박영호 선생이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