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밀양인 농암 박란과 청도 칠곡의 은행나무

500여 년 온갖 풍상에도 생육 상태 좋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는 밀양 박씨 밀직부사공파의 집성촌으로 여느 마을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마을 이름을 '신안'(新安), 뒷산을 '자양산'(紫陽山)이라 하여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朱熹'1130~1200)가 살고 있던 곳과 같이 꾸며 그의 학문과 사상에 바탕을 두고 살고자 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조선(祖先)들이 후손들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마을 앞에 비보로 소위 '새월숲'을 조성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한집안에 두 개의 서원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471년(성종 2년) 화은(華隱) 박계은(朴繼恩)이 오늘날 청정미나리 생산으로 잘 알려진 한재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입향조 화은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깊어 어버이를 정성으로 섬겼으며 학문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라 경서(經書)를 스스로 익혔을 뿐만 아니라, 학문이 높은 사람이 있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배웠다고 한다. 1468년(세조 1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훈령산(薰嶺山) 아래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쳤다.

그들이 밀양 박씨 중에서도 특별히 '새울 박씨'로 불린 데는 화은의 두 아들 순천교수 맹문(孟文), 성균생원 중문(仲文)과 손자 청도교수관 린(麟), 성균진사 란(鸞), 대과에 급제해 평해 군수를 역임한 호(虎)가 청백리로 뽑히고 이후 많은 후손들이 학문과 벼슬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호(虎)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씨 없는 감나무의 접순을 가지고 와서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청도반시를 있게 해 부자 청도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웃 마을 칠곡 오수골에는 란(鸞)이 심은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어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공은 아호가 농암(聾巖)으로 1494년(성종 25년)에 태어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새울 가까운 칠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살며 오직 학문 연마와 청도 문풍 진작(振作)을 위해 힘썼다.

작은 고을 청도는 15세기에 두드러진 인물을 배출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분이 탁영 김일손(1464~1498)과 우졸재 박한주(1459~1504)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과에 당당히 급제했을 뿐 아니라,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청요직에 근무했다.

그러던 그들이 무오'갑자사화로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희생되자 나라 안의 많은 선비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그들을 배출한 청도 고을 선비들의 실망은 더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들의 뒤를 이어 청도 유림을 이끌었던 분들이 농암 박란(1494~1557)을 비롯해 삼족당 김대유(1479~1551), 소요당 박하담(1479~1560)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군'현에는 수령(守令)이 고을을 다스릴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시행착오를 미연에 방지하고, 향리(鄕吏)들의 부정을 막으며, 고을의 미풍양속을 권장하고, 수령의 자문 역할을 하기 위해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유향소(留鄕所)가 운영되었다. 청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여서 회합할 장소가 변변하지 못했다.

향장(鄕長) 소요당의 주장으로 향로당(鄕老堂)을 짓고 이 일을 함께 주도했던 농암이 기문(記文)과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향헌(鄕憲)과 향규(鄕規)를 지었다.

공은 기문에서 '우리 고을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명성과 문물이 갖추어진 곳으로 대대로 문무(文武) 재사(才士)가 적지 않았다'고 하여 청도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공은 산수 좋은 오수골 정사와 농암대를 오가며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실천하다가 1557년(명종 12년) 돌아가시니 향년 64세, 훈령서원에 배향되었다.

공이 심은 은행나무를 보러 가는 길에는 박희춘(전 경성대 교수) 님이 동행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농암이 유유자적했던 농암대도 보았다. 그날따라 날씨가 매우 추웠다. 그럼에도 노구를 이끌고 나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500여 년 온갖 풍상을 겪었음에도 나무의 생육 상태가 좋았다. 공이 청도 지역의 문풍을 진작하기 위해 노력했던 점에 비하면 보호수로도 지정되지 못한 것은 자못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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