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정태춘 '고향집 가세'

고향을 이야기하라고요. 긴 장마가 녹슨 양철지붕을 두드리면 붉은 빗물이 비닐 창을 붉게 물들이던 그런 곳이죠. 자갈뿐인 바닷가, 배고픔에 지친 어린 날, 종일토록 그 바닷가를 바람처럼 돌아다니곤 했었죠. 빨간 칠을 한 등대를 보고 선생님은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을 믿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저 등대는 가난에 쫓긴 아버지들이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니까요. 모두 그렇게 생각했었죠. 섬 마을을 빠져 나가는 게 최선이라고요.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어요. 가끔 아버지들은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죠. 어머니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저 자식들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어요. 바다는 그렇게 늘 통곡을 안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뒷산에는 약수터가 있었어요. 한여름 내내 누이들은 머리에 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날랐어요. 누군가 약수터 옆 바위에 희망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절망을 감추려는 몸부림이란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요. 누군가 말했어요. 가난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물 같은 것이라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중학교에 갈 수 있는 동무들이 절반도 되지 않던 고향 마을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었죠, 그래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어머니가 계시죠. 버스에서 내려 숨이 가쁘도록 걸어 오르면 당신이 사는 집이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당신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고 계시지요. 누구도 그런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조차도 오히려 그런 당신을 책망했지요. 아니 당신이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어린 날, 당신은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지요. 아버지에게 당당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요. 당신이 기다리는 이가 오래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못난 아들은 오직 지긋지긋한 섬마을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대학을 들어가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지요. 아니 어쩌면 세상을 구하겠노라고 소리치던 젊은 날, 당신을 외면했던 어리석음이 지금 당신의 그 긴 기다림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당신이 기다리던 아버지가 당신을 찾아왔던 날, 당신이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당신의 기억 속에는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당신의 기억 속에는 교복을 입고 대문을 나서던 빛나는 아들의 모습만이 자리하고 있겠지요.

/내 고향집 뒤뜰에 해바라기 울타리에 기대어 자고/담 너머 논둑길로 황소 마차 덜컹거리며 지나가고/음~ 무너진 장독대 틈사이로 난쟁이 채송화 피우려/푸석한 스레트 지붕 위로 햇살이 비쳐오겠지/에헤 에헤야 아침이 올게야/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내 고향집 담 그늘에 호랭이 꽃 기세 등등하게 피어나고/따가운 햇살에 개흙마당/먼지만 폴폴나고/음~ 툇마루 아래 개도 잠이 들고/뚝닥거리는 괘종시계만 천천히 천천히 돌아갈게야/텅 빈 집도 아득하게/에헤 에헤야 가물어도 좋아라/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내 고향집 장독대에 큰항아리/거기 술에 담던 들국화/흙담에 매달린 햇마늘 몇 쪽/어느 자식을 주랴고/음~ 실한 놈들은 다 싸 보내고/무지랭이만 겨우 남아도/쓰러지는 울타리 대롱대롱 매달린/저 수세미나 잘 익으면/에헤 에헤야 어머니 계신 곳/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마루 끝 단장 문 앞에 무궁화/지는 햇살에 더욱 소담하고/원추리 꽃밭의 실잠자리/저녁바람에 날개 하늘거리고/음~ 텃밭의 꼬부라진 오이 가지/밭고랑 일어서는 어머니/지금 퀴퀴한 헛간에 호미 던지고/어머니는 손을 씻으실게야/에헤 에헤야 수제비도 좋아라/에헤 에헤야 내 고향집 가세(고향집 가세 중에서)

마당 한구석에 있던 큰 무화과나무도, 담장 한가득 붉은 꽃을 피우던 넝쿨장미도 이제는 다 잘려나가 버리고 여름 내내 파리와 모기를 잡으며 놀던 개천도 메워져 버린 고향 마을은 멈춰버린 시간 속에 당신만이 홀로 있습니다. 아! 달아나면 따라오고 또 달아나면 또 따라오던 그림자처럼 차마 떠날 수 없는 섬마을 영도(影島), 내 고향 이름입니다.

1988년 나온 정태춘'박은옥의 6집 앨범. '戊辰 새 노래'. 이 앨범에 정태춘이 노래한 '고향집 가세'가 실려 있다.

전태흥 미래티앤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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