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하루 앞둔 8일 오전 이길자(가명'73'여) 씨는 몸져 누워있는 딸 오명숙(가명'47'여) 씨와 외손자 박승훈(가명'22) 씨를 보며 연방 눈물을 훔쳤다. 오 씨와 박 씨, 그리고 이 씨의 아들 오명훈(가명'44) 씨마저 모두 희귀난치병인 '소뇌위축증'을 잇달아 앓게 되면서 이들을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소뇌위축증은 말 그대로 소뇌가 점점 줄어들면서 뇌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는 병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뇌병변까지 겹쳐 의사소통을 아예 할 수 없다. 이 씨는 "'유전인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듣고 '나 같은 애미 잘못 만나 저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진다"고 눈물을 쏟았다.
◆불행, 한꺼번에 오다
10년 전, 이 씨는 막내아들을 출산한 뒤 얼마 되지 않은 딸 오 씨의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둔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말도 어느 순간 어눌해진 것 같아 오 씨를 데리고 종합병원을 찾았던 이 씨는 '소뇌위축증'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뇌위축증이 유전으로 생기는 병이라는 말에 제 귀를 의심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친가, 외가 모두 그런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딸에 이어 아들도 같은 병으로 쓰러지고, 외손자까지…."
오 씨가 쓰러지고 몇 년 지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손자 박 씨에게도 병마가 찾아들었다. 박 씨가 중학교 2학년이던 2006년, 이 씨는 박 씨가 갑자기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을 찾았다.
박 씨가 시간이 지나도 낫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한다는 얘기를 들은 이 씨는 불안한 마음에 더 큰 병원에 데려가 MRI를 찍는 등 정밀진단을 받게 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역시 소뇌위축증. 이후 외환위기 당시 실직 후 집에만 있던 아들에게까지 소뇌위축증이 발견됐다.
"우리 외손자는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달리기도 잘해서 운동회 때 이어달리기 대표 선수로 나갔던 아이였어요. 그렇게 건강하고 달리기도 잘했던 녀석이 한순간에 주저앉아버리다니…. 게다가 한창 성장할 때 몹쓸 병에 걸리는 바람에 병이 너무 빠르게 진행돼 제 어미보다 상태가 더 안 좋다고 합니다."
◆단란했던 가정도 깨지고…
오 씨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한 전문대학의 원예과를 졸업한 오 씨는 같은 과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졸업한 뒤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고, 오 씨는 전업주부로 2남1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오 씨에게 행복은 사치였다. 남편의 사업은 점점 어려워졌고, 비슷한 시기에 오 씨도 아프기 시작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방황하던 남편은 결국 3년 전 집을 나가버렸고 오 씨는 자녀들, 시어머니와 함께 남겨졌다.
이 씨가 딸 오 씨와 외손자 박 씨를 데려온 건 지난해 2월이었다. 오 씨와 박 씨를 간호해오던 시어머니가 더는 이들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사돈 어른의 연세가 저보다 10살 정도 많았어요. 저도 나이가 일흔이 넘었지만 사돈보다는 그래도 젊잖아요. 그래서 두말 않고 딸과 외손자를 집으로 데려왔지요."
현재 이 씨의 다른 외손녀와 외손자는 친가에서 살고 있다. 외손녀와는 가끔 연락하지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최근 대학을 졸업했다는 소식을 막내 외손자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중학교 2학년인 막내 외손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와 형을 보러 찾아온다.
"막내 외손자가 찾아올 때마다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아픈 자기 어머니와 형을 보면서 '밥 잘 먹고, 아프지 마라'고 말하고 갑니다. 자기 어머니한테는 꼭 한마디 더 덧붙입니다. '너무 말랐다. 밥 잘 먹어서 살 좀 쪄라'고요."
◆내가 죽으면 이들은 어떻게'''
이 씨는 집에서 오 씨 남매와 박 씨를 간병하고 있다. 국가에서 지원해 준 요양보호사가 간병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세 명을 모두 보살피는 데 힘이 부친다. 게다가 오 씨의 경우 지난해 11월 겨우 연락이 닿은 남편과 이혼한 뒤에야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지정됐고, 겨우 약값이라도 감당할 수 있게 됐다. 그전까지는 이 씨가 이곳저곳에서 변통하거나 주변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약값을 부담해왔다.
집보다 환경이 좋은 요양보호시설로 오 씨와 박 씨를 옮기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한 달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지원금과 기초노령연금을 합쳐 3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는 요양보호시설에 옮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는 포기했다. 이 때문에 오 씨와 박 씨는 소뇌위축증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약 이외에는 다른 재활치료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다.
더군다나 이 씨 본인도 나이가 많아 노환으로 시달리고 있다. 척추 디스크를 앓은 지는 오래됐고, 최근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적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귀도 잘 안 들리기 시작해 보청기가 없으면 잘 듣지 못한다.
이 씨는 "지금이야 내가 돌봐줄 수 있지만 내가 저세상으로 가고 나면 누가 이들을 돌볼지 생각만 해도 막막하다"며 "이 때문에라도 요양보호시설을 알아봤었는데 지금 처지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더라"고 굵은 눈물을 연방 흘렸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지정 문제 때문에 동주민센터에 가게 되는 날이면 문을 열 때부터 눈물이 나요. 점점 죽어가는 자식들이 자꾸 눈에 밟혀서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 싶은 마음에 계속 눈물이 흘러요. 참으려고 해도 안 되네요. 어떻게든 힘내서 보살펴야 하는데…."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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