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기생의 슬픈 삶을 노래한 가수, 이화자(상)

독특한 음색과 창법으로 애달픔 눅진하게 표현

한국가요사의 초창기에는 기생 출신들이 제법 많이 가요계로 진출했습니다. 그 까닭은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딴따라''풍각쟁이'라며 천시하던 풍조로 가득했던 시절, 그 누가 감히 가수되고 싶다는 꿈이나 꾸었을까요?

그런데 1930년대 중반 경기도 부평의 어느 술집, 술상 앞에서 노랫가락을 특히 잘 부르는 작부(酌婦)가 있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예나 제나 술꾼들은 재미난 술집을 찾아서 불원천리 더듬어 다니는 묘한 버릇이 있질 않습니까? 그 술꾼들로부터 입소문이 난 여성 가객은 다름 아닌 이화자(李花子'본명 李願載)였습니다. 훗날 민요계의 여왕이 되어서 그 평판이 높았던 가수입니다.

이화자의 노래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자르르 흘러내리는 듯한 윤기에다 팽팽한 탄력이 가히 일품입니다. 주로 기박한 신세를 넋두리조로 한탄한다거나, 서민들 가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삶의 피로와 체념, 애달픔이 눅진하게 묻어나면서 사무치는 공감으로 젖어들게 하는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당시 뛰어난 여성 가수들이 많았건만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화자만의 독특한 음색과 창법이 있었습니다.

이화자는 권번이나 정악전습소 등에서 정식으로 수련을 받은 기생도 아니었고, 그저 팔자가 기구하여 이 거리 저 거리 물풀처럼 떠돌던 중, 안목이 뛰어난 작곡가 김용환(필명 김영파)에게 발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화자가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용환의 전폭적 지원과 배려를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용환과 이화자는 이렇게 맨 처음 술집 손님과 작부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경기도 부평 출생이라지만 이도 확실치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이화자는 평생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1916년 어느 빈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술집에 맡겨져 더부살이를 해온 듯합니다.

이런 그녀의 애환이 가요 창법과 음색에서 왜 묻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이화자가 뉴코리아레코드사를 통하여 가수로 첫 데뷔한 것은 1936년, 이화자의 나이 20세 때의 일입니다. 그녀가 불렀던 '초립동'은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가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전국의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선 광경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화자의 사진과 노래 가사지가 인쇄되어 전국의 레코드 상점으로 속속 배달되었습니다.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으로 있던 이화자는 인기가 솟구치면서 자연스럽게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옮겨가게 됩니다.

당시 포리도루는 왕수복, 선우일선 등을 비롯하여 유명 기생 출신으로 가수가 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신민요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신민요곡들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화자와 그녀의 노래는 날개를 달고 바람 부는 하늘로 날아오른 한 마리 새와도 같았습니다. '네가 네가 내 사랑''조선의 처녀''실버들 너흘너흘' 등을 불러서 히트를 했는데, 주로 조선 중엽 이후 서민들에 의해 즐겨 불리던 잡가 스타일의 민요를 많이 취입했습니다.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김용환은 이화자 노래의 효과를 제대로 살려내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말 그대로 이화자의 노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버들 숲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조선의 콧노래였습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압제 속에서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전통의 가락이었고, 삶의 애환을 되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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