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별별세상 별난 인생] 경주에서 대금 연주'제작 김주형 씨

대금 소리에 빠져 해부까지… 대금 깎게된 인연

경주에서 대금을 제작하는 김주형(45) 씨. 한옥에 '대금공방 금률'이란 이름을 걸고 대금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금 제작은 물론 큰 행사 때마다 대금 연주를 하는 그는 천상 '대금 장인'이다. 지난주 그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묵묵히 대금을 깎고 있었다. 도대체 그는 왜 대금을 깎고 있을까? 궁금했다.

"군 제대 후 어느 날 김유신 장군 묘 부근을 산책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비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솔숲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그 소리는 마치 '산(山)의 음성'처럼 들리면서 제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게 대금과의 첫 인연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 청아한 소리에 이끌려 한참 동안 대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았다. 그는 "그 소리는 저의 가슴을 뻥 뚫어놓았다"고 표현한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그때부터 '극심한 대금앓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대금과의 인연 맺기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대금을 배우기에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그래도 '대금 사랑'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집요했다. 대금을 메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마침내 대구시립국악단 대금 수석 연주자였던 신보식 씨와 인연이 닿아 사사하며 기초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부가 '소리를 내는 실력과 소리를 듣는 실력이 매우 좋다. 취미로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전공해 보라'고 권했다. 그 한마디가 인생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금에 전념했다. 주위에선 "대금을 하면 밥 못 먹는다"며 적극 말렸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맞섰다.

 

◆본격적인 대금 공부

이듬해 늦깎이 학생으로 경주 동국대 국악과에 입학했다. 대금 공부는 예상보다 험난했다. 남달리 특출한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독한 연습벌레가 됐다. 대금연주회를 하면서 국문학과 여학생 김윤정을 만난다. 첫눈에 운명적인 만남임을 직감, 열렬한 연애에 빠졌다. 1년 만에 결혼했다. 둘 다 학생 신분이라 생활형편이 어려웠다. 대금 레슨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버텼다. 대금 공부를 하면 할수록 '대금 연주의 최고가 되려면 내 손으로 직접 대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솟아났다. 애지중지하던 대금을 해부했다.

그때부터 대금을 깎기 시작했다. 어릴 적 목공예가를 꿈꿀 정도로 손재주가 남달랐던 터라 대금 만드는 일은 재미있었다. 대금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서 주문을 받아 학비와 생활비로 충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금 사부 신보식 씨의 친구라는 사람이 찾아와 '대금을 한번 보자'고 했다. 만들어 둔 대금을 둘러본 후 그는 '성음과 음정이 정확하지 않다'며 모조리 '불합격!' 처분을 내렸다. 충격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대금을 잘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바로 대금연주가로 명성이 높은 황영달 씨였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국악 음정에 대한 체계를 배웠다. 그리고 몇 달 뒤 황 씨가 선뜻 자신의 대금을 맡기며 수리를 의뢰해 왔다. "황 선생님의 대금을 수리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지요. 그만큼 제 실력을 인정해 준다는 뜻이니까요." 황 씨는 수리비 대신 음을 측정하는 기구를 선물했다. 그것이 '대금 제작가'로 정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신보식 선생님은 취법과 대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황 선생님은 정확한 음정을 잡도록 가르쳐 준 은인"이라고 한다.

◆'대금 장인' 되다

대구경북의 대금 동호인들로부터 '대금 장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금 제작 주문도 잇따랐다. 요즘은 자신의 작품마다 '취월'이라는 호를 새겨 넣는다. 대구의 대금 동호인 이정현(56) 씨는 "전국의 대금 공방은 100여 개쯤 있지만, 그의 작품은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멋지다"고 평가한다. 그는 요즘도 틈틈이 사부를 찾아가 대금 소리를 다듬는다. '좋은 대금을 만들려면 좋은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대금 제작의 장인이 되는 길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조각칼에 손을 다치는 일은 허다했다. 한 차례 큰 위기도 겪었다. 4년 전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서울의 병원을 오가며 1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거의 회복된 상태지만 늘 건강에 신경을 쓴다. 위기를 극복한 후 지난해 경주 오릉 옆 황남동에 한옥을 사들여 '대금 공방'으로 꾸미고 있다. 대금 동호인들에게 교육 장소와 놀이터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대금 제작의 전 과정을 보여 줄 계획이다. 경주의 대금 동호인 20여 명은 이미 '금률애(愛)'를 결성, 공방이 완공될 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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