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김수희 '애모'

레코드판을 꺼내어 조심스레 먼지를 닦는다. 그리고 턴테이블에 올린다. 그 후엔 불을 끄고 노래를 듣는다.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성악가의 귀한 음반을 듣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처럼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애모의 가수 김수희다.

김수희는 그녀가 부르는 애절한 노래와는 달리 강골이다. 그녀가 2005년 가수 노조가 출범했을 때, 방송에서의 가수와 배우의 출연료 차별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냈던 소신 있는 발언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또한 그녀는 성인가요라는 트로트를 가지고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소위 성인가수라고 불리는 가수들 다수가 그렇듯이 그녀 또한 1973년 미8군에서 노래를 시작했지만 그녀의 노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0년이 되어서였다. 그녀의 노래들은 발표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서야 히트한 것이 많다.

데뷔작 "너무 합니다"는 무명 가수가 부른 노래로 알려졌다가 7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1987년에 발표한 "남행열차" 또한 7, 8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가로 자리 잡으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그녀를 지금까지 현역으로 남게 해 준 노래 "애모" 역시 1991년에 발표되었지만 1993년에 이르러서야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늦깎이 히트에 대해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일정한 시점을 노래한다면 성인가요는 한 시대를 노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서 그녀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가수가 된 것이 더 기쁘다고 속내를 아낌없이 털어놓는다.

사실 그녀의 노래는 대부분이 애절하다. 그 애절함은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소위 꺾인 소리에 있다. 그것을 그녀는 자신만의 색깔이라고 말한다. 7년간의 무명의 시간이 자신만의 색깔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그녀가 말하는 가수의 조건은 오늘 이 순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이돌 가수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넘어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마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당신은 나의 남자요.'(애모 가사 전문)

"애모"는 유영건 작사'작곡으로 "바람의 소곡"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그녀는 양해를 얻어 제목을 좀 더 쉽고 감성적인 "애모"로 바꾸었고 그 결과 또한 좋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노래가 80년대 초반 우리 사회를 소비와 향락으로 물들였던 소위 유흥문화의 정점에 서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녀의 노래가 흐느적거리는 도시의 밤 문화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 비판은 도시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가난과 마지막 순간 몸마저 팔아야 했던 우리 누이들의 고단한 삶을 사랑놀음이라는 애절함으로 분칠했다는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그 평가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는 정당할지 모르지만 대중적 평가를 무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올바르지 못해 보인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우리 가요계가 일대 전기를 맞이할 무렵, 그녀의 노래 "애모"가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을 휩쓸었던 것을 단순히 질퍽한 밤 문화를 대변하는 노래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민족의 한 같은 것이 그녀의 노래에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턴테이블이 거친 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판을 뒤집어 주어야 할 시간이다. 레코드판에 새겨진 소리 골을 따라 출렁거리는 바늘이 그녀의 감칠맛 나는 보컬이 되어 흐른다. 이렇듯 노래가 끝나면 다시 레코드판을 닦고 또다시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옛것에 대한 향수가 늘 새로운 것으로 향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예순의 나이를 넘기고도 여전히 현역인 그녀에게 존경을 보낸다.

전태흥 미래티엔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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