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소울 메이트

이 근 화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

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붇는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시집 『우리들의 진화』(문학과지성사, 2009)

솜사탕을 들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천진난만한 풍경이다. 아이들에게 아무거나 가리키며 '이거 어때?' 물어보라. 십중팔구는 '좋아' 아니면 '싫어'다. '뭐가?'라고 되물으면 거개가 '그냥'이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좋다.

누구는 이 시를 인칭으로 풀더라만 나는 이 시의 형용사에 끌린다. '좋다'는 아무리 봐도 반어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매고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데 그 자리다. 얽매인 삶의 터전 같은 골목에 서서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다. 벗어나기 위한 기다림의 의식이다. 비 이전의 기억은 먹구름, 그 이전의 기억은 '흰 장르'의 구름이다. 그 '감정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도 젖으면 그리 될까 하는 마음이다. 우리도 흰 구름이 되어 '비의 냄새를 훔친다'면, 먹구름같이 '발이 퉁퉁' 부어 무거워지면 비가 되어 내릴 수 있다? 창공을 떠돌다가 내리고 젖어서 흘러가고 올라가는 물의 끊임없는 일탈과 속박의 순환, 그렇다면 비는 손발 묶인 삶의 갈증을 푸는 '소울 메이트'다? 아니면 어떤가. 나는 이 시가 그냥 좋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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