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탄생 100주년 '미완의 화가' 이쾌대] <하> 가족이 지켜낸 작품들

거친 세월 공안당국 눈 피해 간직…"언젠간 영구보존할 기관에 갈 것"

이쾌대의 막내아들 이한우 씨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작품을 관리하고 있다. 이 씨는
이쾌대의 막내아들 이한우 씨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작품을 관리하고 있다. 이 씨는 "언젠가 아버지의 작품은 공공기관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우 씨는 아버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이한우 씨는 아버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무희의 휴식'을 꼽았다.

대구 출신 화가인 이쾌대 화백의 대부분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막내아들 이한우 씨를 14일 경기도 수원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평생 사업가의 길을 걷다가 이제 일선에서 은퇴했다. 아들은 아버지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연상시킬 만큼 시원스런 눈매와 콧날이 아버지를 빼닮았다. 그의 집에는 아버지 이쾌대의 영인본 작품이 곳곳에 걸려 있다. 이쾌대가 일본 유학시절, 어머니 유갑봉 여사에게 곱게 한복을 입히고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작품 '카드놀이 하는 부부'가 가장 먼저 반겨주었다. 60대의 아들은 이 작품 속에서 남북으로 헤어져 평생 만나지 못한 부모님을 떠올린다. 고운 모습으로 함께 앉아 카드를 즐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복한 시절은 그림 속에서 영원하다.

◆그림이 남아있기까지

근대작가의 작품이 유족에게 고스란히 모여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이쾌대 화백은 특히 전쟁의 소용돌이와 세상의 날 선 시선에도 그 작품이 보존됐다. 부인 유갑봉 여사 덕분이다. 막내아들 이한우 씨가 아버지 작품을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 4가의 한옥에 살던 중 아버지가 1950년 9월 집을 나가시고, 1957년까지 그 집에 살았어요. 그 집 부엌 천장에 꽤 넓은 다락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못 올라가게 했어요. 그 다락방에 작품이 있었던 거죠." 이사를 했지만 작품은 이사 간 집 다락에 보관돼 있었다.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1970년대까지 아궁이까지 뒤지는 가택수색이 종종 있었지만 다행히 작품은 들키지 않았다. "17세 때 다락에 올라가니, 유화 대작은 모두 둘둘 말려 있었어요. 소품들은 신문지를 앞뒤로 깔아 뉘어져 있었죠. 안방 벽장문을 열어야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기에 외부인들은 상상도 못한 공간이었어요."

둘둘 말린 유화를 펼치려 하자, 내려앉아 있던 물감이 떨어져버렸다. 진땀이 났다. 이 씨는 그 떨어진 조각을 일일이 모아놨다가 복원할 때 사용했다. 1987년 해금이 되고 3명의 복원전문가에게 복원을 부탁했다. 당시 사람들은 "40년 지난 작품이 전쟁을 거치고 이 정도 보관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2년 이상의 복원과정을 거쳐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다. 당시 '한국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놀라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쾌대 남은 가족들의 삶

이쾌대 화백이 1950년 9월 집을 나가자, 부인 유갑봉 여사는 병환 중인 시어머니와 네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시 패물, 비단 등 집안에 돈 될 만한 것을 팔다가, 비단 장사가 됐다. 훗날 포목점을 운영했으며 택시 운수업까지 사업을 넓혔다. 이한우 씨는 당시 어머니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머니는 똑똑한 분이셨어요. 수완이 좋으셔서 사업이 잘됐어요. 덕분에 우리는 195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고생을 몰랐죠. 1950년대 후반에는 누나를 위해 독일제 피아노까지 사주실 만큼 부유했어요. 택시를 1대 구입해 운수업을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100대로 늘어났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견디기 힘든 시대였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형사가 들이닥쳤다. 일상적 감시와 가택 수색은 물론이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한번 끌려갔다 오면 어머니는 6개월을 못 일어날 정도로 심하게 당했어요. 저도 한번 끌려갔다 온 적이 있는데, 얼마나 끔찍한지 뒤돌아보기가 싫어요."

유갑봉 여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0년 이상 투병하다가 1980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이쾌대는 네 아이와 부인이 있는 남한이 아니라, 북한을 선택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신산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원망은 없을까. 이한우 씨는 의외로 '쿨'하게 답했다.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큰아버지 이여성이 당시 여운형의 오른팔이었으니 아마 남한에 와서 살기 힘들다고 판단하셨을 거예요."

이쾌대 화백의 예술적 끼와 재능은 이한우 씨가 일부 물려받았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고 솜씨가 있어 대학도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회화를 전공하다가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오부잣집'으로 불리던 이쾌대의 아버지 이경옥은 칠곡뿐만 아니라, 대구시내, 왜관 등지에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당시 칠곡의 집터만 해도 2만1천500㎡(6천500평)나 됐다. 두 아들 이여성, 이쾌대가 월북하고 난 후 재산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여성과 이쾌대는 이 많은 재산을 두고 떠난 것이다. 이한우 형제는 굳이 재산을 찾아 나서고 싶지 않다. 부질없다는 생각에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전

올해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9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6주간 열린다. 작품뿐만 아니라 사진, 이쾌대가 사용하던 홍차 잔 등의 자료들이 세밀한 복원을 거쳐 전시장에 선보인다.

아쉽지만 올해 대구에서 이쾌대의 전시를 보기는 힘들다. 이한우 씨에게 대구는 아버지의 고향이라 특별하다. "대구에서 작품을 빌려달라고 하면 거의 거절한 적 없이 보냈어요. 자주 선보였죠." 하지만 100주년 기념전을 대구에서 열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2010년 말부터 2011년 사이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이쾌대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전시장에 두 번 가봤는데, 그때마다 실망이 컸어요. 대단한 작품이 걸려 있는데 사람들은 거의 없었거든요. 상실감이 컸죠. 서울에는 한두 작품만 걸려도 많은 인파가 몰려오는데 말이죠."

◆앞으로 작품은?

지금까지 모든 작품은 이한우 씨가 맡아 관리해왔다. '빅 히트' 작가 작품을 그냥 놔뒀을 리 없다. 전국 각지의 지자체 관계자들은 물론 미술관 관계자들이 그에게 '러브 콜'을 했다. 여러 재벌가와 컬렉터들이 찾아와 고가에 작품을 팔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해왔다.

"절대 돈에 유혹될 일은 없을 겁니다. 돈이 다 부질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배웠으니까요. 제가 작품을 관리할 만큼 여력이 되니 당장 계획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영구보존할 수 있는 공공기관에 가지 않을까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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