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떡잎만 보고는 모른다

며칠 전, 어머니 생신을 맞아 대구 친정집에 들렀다. 일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서너 시간 말동무를 해드렸다. 가까이 사는 이모도 함께했다. 늙은 자매는 당신들이 살아낸 매운 시집살이를 소재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로서는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얘기인지라 이따금 추임새만 넣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다 이모의 시동생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나도 모르게 귀를 세웠다.

이모는 망나니 시동생 때문에 10년 넘게 생고생을 했더랬다. 시동생은 걸핏하면 밥상을 엎었고, 형수가 해놓은 빨래가 깨끗하지 않다는 트집을 잡아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을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거기다 형수에게 욕하는 건 기본이고, 주먹질까지 서슴지 않았다니, 그처럼 막된 사람도 드물었으리라. 그런데 이모 말씀으로는 그 시동생이 마흔 살을 넘기고부터 확 달라졌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달라졌느냐면 그의 아내가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세상에 우리 그이만큼 좋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남편은 흔치 않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남편에 대해 흉을 보았으면 보았지 그런 최상급의 칭찬은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전에 어떤 선생이 수업시간에 뱉은 막말로 구설에 올랐다. 그 말 중에서 '선생들은 얼굴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는 부분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전후 맥락으로 보아 선생은 학생의 얼굴만 봐도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인간인지 깡그리 알 수 있으니까 떡잎이 노란 학생은 교실을 나가라는 의미였다.

나로서는 그 문장의 주어가 왜 선생들인지 도무지 요령부득하였다. 상식적으로 관상쟁이나 무당이 주어로 쓰였어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물론 선생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반관상쟁이가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라고 한다. 관상은 결코 심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얼굴만 보고 사람이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것은 열에 아홉, 섣부른 예단이다. 백번을 양보하여 얼굴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 치자. 괜찮은 견적이 나오면 거두고, 몹쓸 견적이 나오면 내칠 것인가? 애인을 선택할 때는 그래도 되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은 그러면 안 된다. 너는 견적이 틀려먹었으니 교실을 나가라고 할 권리가 선생에게 있을까? 없다. 학생의 견적을 요모조모 분석하여 더 나은 실력, 더 나은 품성을 갖춰나가도록 돕는 이가 선생이므로. 속고 의심하고 체념하면서도 끝끝내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 선생이다.

이모의 시동생 얘기에 유독 마음이 끌린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 만물이 그러하듯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선생은 그 변화가 좋은 쪽으로 일어나게끔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얘기에서 다시금 되새겼다고나 할까. 선생만이 선생이랴. 부모도 친구도 배우자도 선생이 될 수 있다. 이모 시동생의 선생은 그 아내였다.

지난봄, 베란다 화분에 호박씨를 심었더랬다. 떡잎이 크고 푸르고 실했다. 꽃도 매우 많이 피었다. 그러나 정작 호박덩이는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아는 농부에게 물어보았더니 거름을 안 줘서 그런 거였다. 떡잎이 아무리 튼실해도 저 혼자서는 못 자란다. 떡잎이 좀 부실해도 물과 거름과 햇볕을 적절히 지원해주면 잘 자랄 수 있다. 그러므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은 절반만 진실이다. 대부분 속담이 그렇듯이 이것 역시 평균수명 24세('조선 사람의 생로병사'라는 책을 보면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24세)이던 시절 얘기이다. 요즘처럼 오래 사는 시대에 얼굴만 보고, 떡잎만 보고, 혹은 생의 어느 한 국면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 일이다.

3월 개학이 코앞으로 닥쳤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선생인 나, 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릴 작정이다. "비록 네 떡잎은 미약하나 네 열매는 창대하리라."

박정애/강원대 교수·스토리텔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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