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기생의 슬픈 삶을 탄식한 가수, 이화자(하)

'타령' 스타일 불러 인기…젊은 나이에 쓸쓸히 죽음 맞아

이화자의 인기가 자꾸만 상한가를 치게 되자,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이화자를 만나 거액의 전속료를 제시하고 포리도루사에서 소속사를 바꾸도록 했습니다. 오케로 옮긴 이후 이화자는 신민요 '꼴망태 목동'(조명암 작사'김영파 작곡'손목인 편곡, 오케레코드 12190)과 '님 전 화풀이' 등의 특급 히트곡을 잇달아 냈습니다. 1939년, 그러니까 이화자의 나이 스물셋에 발표한 '어머님전상백'(조명암 작사'김영파 작곡, 오케 12212) 음반에는 '자서곡'(自敍曲)이란 장르 명칭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떠돌이 술집 작부로 살아온 가수 이화자의 삶과 애달픔을 마치 자서전처럼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라 할 수 있었지요. 절절한 한과 애달픔이 눅진하게 묻어나는 이 노래는 듣는 이의 간장을 토막토막 썰어내는 단장곡(斷腸曲)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복모구구 무임하성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같은 해에 이화자가 취입했던 대표곡으로는 '네가 네가 내 사랑' '실버들 너흘너흘' '노래가락' '범벅타령' '삽살개 타령' '망둥이 타령' '금송아지 타령' '십오야 타령' 등입니다. 곡명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화자의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신민요 스타일의 창법으로 '타령'조를 즐겨 불렀습니다. 술집마다 거리마다 이화자의 노래는 줄곧 흘러나왔습니다. 보잘것없었던 시골의 술집 여인은 하루아침에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1940년 봄, 이화자는 자신의 전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절절한 노래 '화류춘몽'(花柳春夢, 조명암 작사'김해송 작곡, 오케 20024)을 발표합니다. 이 노래는 모든 화류계 여성들의 기막힌 처지를 그대로 대변한 작품이었습니다.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던 버릇이 있던 이화자는 아편에 슬금슬금 손을 대기 시작하다가 차츰 중독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순회공연 중에도 아편이 떨어지면 온갖 소동을 부렸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암흑기였던 1942년은 이화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암흑기였던 것이지요. 이 무렵 취입한 친일가요 '목단강 편지'가 그녀의 마지막 히트곡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이미 마약중독자 이화자에게 8'15 광복은 전혀 감격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비참한 생활고와 고독만이 그녀의 앞에 빈 밥그릇처럼 휑뎅그렁하게 자리 잡았을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형편없이 망가진 이화자는 서울의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 월세를 얻어서 오로지 아편으로만 세월을 잊으려 했습니다. 불과 30대 초반의 한창 고왔을 여인은 마치 할머니의 얼굴처럼 늙어보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나던 해, 이화자는 차디찬 방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1년 5월,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음반인 '이화자 걸작집'(오케레코드, 31037)은 지금도 다음과 같은 세리프를 뿌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애타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고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이것이 화류춘몽의 슬픈 얘기다

기생이라고 으레 짓밟으라는 낙화는 아니었건만

천만층 세상에 변명이 어리석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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