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당신, 소금기를 잔뜩 머금고 세차게 불어오던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선 동백이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는 시간, 다시금 봄이 오고 있습니다.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기는 잠깐이라고 최영미 시인은 노래했지요. 이렇듯 다시 봄이라면 이 시간이 새로운 것은 아닐진대 우리가 이토록 애타게 기다린 것은 지난겨울이 유난히 매서웠던 까닭입니다. 해서 우리는 더욱, 이 시간이 서둘러 가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그래요. 그리움은 쉽게 만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기에 더 절실한 것이지요. 그 신산한 바람을 이겨내고 남녘의 바닷가에서부터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어린 날, 누이들의 곱게 빗어 넘긴 머릿결을 만들던 동백도 이제 막 그 찬란한 만개의 채비를 서두르는 참입니다.
동백이 피면 당신은 눈물이 난다고 했지요. 선운사였던가요. 마지막 동백이 피고 지는 그곳에서 굵은 눈물방울처럼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그 붉은 꽃잎을 차마 당신은 마주 볼 용기가 없었노라고 말했지요.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쌓아왔던 사랑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던 순간 같았다고, 그래서 결국 사랑을 잃고 맨발로 작은 냇물을 건너 선운사 뒷안에서 울고 말았다는 김용택 시인의 시처럼 그저 담벼락에 기대어 그렇게 서럽게 울었노라고 당신은 또 고백했지요. 당신의 그 고백 끝에서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봅니다. 당신의 그 깊은 한숨 속에 젊은 날, 우리가 견뎌냈던 것들과 견딜 수 없었던 것들을 함께 봅니다. 야만의 폭력은 이길 수 있었으되 친구들의 반목과 질시는 견딜 수 없었노 라든 당신의 절규를 듣습니다. 그래서 선운사의 동백은 눈물처럼 서럽게 졌던 것일 테지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가는 그대여/꽃이 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최영미 시, 이건용 곡, 전경옥 노래 '선운사에서' 전문)
하지만 당신,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이 기세등등하던 겨울도 한 줄기 햇살 아래 꽃자리를 내어주고 그늘로 숨어들지 않던가요. 당신은 말했어요. 겨우내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우는 것은 맨발로 언 땅을 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그것이 늦은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당신이 동백을 보러 가는 이유라고요. 아마도 아직 그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세월을 견디고 지켜온 나무들도 기지개를 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임을 알고 있을 테지요. 하지만, 부지런히 새봄을 준비하는 어린 새싹들은 결국 언 땅을 녹이고 세상에 찬란한 얼굴을 내밀겠지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못 떠나실 거예요/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송창식 노래 '선운사' 전문)
아침을 열던 봄비를 맞으며 당신이 부르던 노래를 불러봅니다.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노래입니다. 나이만큼 눈물이 많아진 이 봄, 다시 선운사를 가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는 긴 시간,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변명처럼 사는 것에 휘청거린 까닭입니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시인이 맨발로 건넜다는 개울을 건너 가슴 속에 눈물을 삼킨 길들과 무리를 지어 세상에 왔다가 그렇게 무리지어 사라지는 꽃들과 우리의 소중했던 시간을 만나고 싶습니다. 해서 어쩌면 지금껏 미처 당신에게 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담아 두어야만 했던 말, 사랑과 용서를 그곳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동백꽃이 떨어진 길 위에 그냥 앉아 옷에 붉은 물이 들어도 어느 누구 하나 재촉하는 이 없는 선운사, 그 봄 길 끝에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아! 그리운 봄입니다.
전태흥 미래TNC 대표사원 62guev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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