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자는 말이가? 두어 달 새 동네 사람 반이 죽어나갔다." 달포쯤 전에 이웃집 길영이가 식솔들을 데리고 마을을 떠나면서 악에 받쳐 내뱉은 말이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곡기라고는 입에 대 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고, 웬갖 나무뿌리며 풀 나부랭이로 하루하루 죽지 못해 버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향을 등지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갑수였다. 한평생 보고 자란 세상은 고향이 전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고 자라 묻힌 곳이었고, 자신도 언젠가 그곳에 뼈를 묻을 줄로만 알았다. "어데로 갈라꼬?"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별다른 답이 없는 것은 갑수도 알고 있었다.
◆고향을 등지다
길영이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짐짓 기운이라도 내려는 듯 목청에 힘을 주었다. "웃자든지 들 너른 데로 가봐야제. 나라에서 구휼미를 준다는 말도 들리고, 역병에 걸려서 나은 사람도 있다카데. 니도 같이 가자." 그렇게 길영이네 다섯 식구를 떠나보내고 나서 마을은 한층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정월 대보름에 박 참판 댁에서 곡식 한 바가지라도 나올 줄 알았더니 굳게 닫힌 문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없었다. 마을 사람 몇몇이 문안 인사를 핑계로 찾아갔지만, 집안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마을은 하루가 다르게 비어갔다. 지난해 가을 한두 집이 큰 동리에 사는 친척집을 찾아간다며 떠난 뒤로 돌아오는 사람 없이 떠나는 사람의 행렬만 동구 밖으로 이어졌다. 약 한 첩 못 써보고 막내를 떠나보낸 뒤 장례는커녕 향불 하나 제대로 켜보지 못하고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준 것이 전부였다. 세상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경칩이 지나면서 하루하루 날은 따뜻해졌다. 춘궁기가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지금보다 더 혹독한 날이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갑수는 마음이 급해졌다. 길영이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두려웠지만 가만히 앉아 굶어서 죽고 병 걸려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더 무서웠다. 부쩍 말수가 적어진 아내와 큰딸, 두 아들에게 떠나자고 했다. 식구들은 말이 없었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뻔히 알기에, 무작정 떠나는 것이 마지막 발악인 것을 알기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다
차라리 고향에서 뼈를 묻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길을 나선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20여 호가 넘던 아랫마을도 네댓 집을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소나 돼지, 심지어 닭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딱히 정해둔 곳은 없었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길을 떠났고, 날이 저물면 빈집을 찾아가 이슬을 피했다. 다른 식솔들에게 불이라도 피우라고 한 뒤 큰아들과 함께 동네를 돌아보기로 했다. 동네 반대쪽 끝에서 마침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이 보였다. 곡식 한 줌이라도 얻어볼 요량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누구 없소? 먹을거리 좀 나눠주이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니만 시커먼 형체가 고개를 내밀었다. 차마 사람의 몰골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처참한 형상이었다. 두어 걸음 다가서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지 마! 다 죽었어. 빨리 가. 도망가." 뭐라고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새 부엌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골이 상접해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삐쩍 마른 여인이었다. "역병이 돌았는데, 소문 못 들었소? 다 떠났다카이. 아부지 때문에 내만 남았구먼. 빨리 가이소. 다 죽심더." 겁에 질린 갑수는 아들 손을 붙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립문을 나섰다. 그제야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저 텅 빈 정도가 아니라 마을이 통째로 죽어가고 있었다.
갑수와 큰아들은 말이 없었다. 조금 전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 길을 가로막고 있던 가시 덩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을이 폐쇄된 것이다. 역병이 돌았으니 근처에도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병에 걸리면 나라에서 구휼미도 주고 약도 나눠준다는데. 마을이 통째로 비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병든 마을에 하루라도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밤이슬을 맞더라도 길을 떠나야 했다. 아내와 큰딸, 둘째 아들이 있던 집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보! 가자. 여그서 자믄 안된다." 집 앞에 닿기도 전에 목청껏 외쳤다. 하지만 집안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부엌에는 사그라져가는 불씨만 남았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옥아! 여보~!" "어무이~!" 갑수와 큰아들은 행여 길이라도 엇갈렸을세라 목청껏 이름을 불러댔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도무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고함치며 헤매다 보니 동리 밖으로 한참을 멀어졌다. 분명히 마을에는 없었다. 아내가 오늘 왔던 길을 되짚어 갔을 리 만무다. 정말이지 감쪽같이 사라진 셈이다. 이대로 밤을 길에서 지샐 수는 없었다. 마침 산비탈 아래 굽잇길에 성황당이 보였다. 밤은 깊었고 어슴푸레 달빛만이 성황당 지붕을 비추었다. 화롯불에 몸을 녹이자 피곤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잠 들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 했지만 어느새 고꾸라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잠을 깬 것은 새벽 한기 때문이었다. 화롯불은 꺼져서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서둘러 큰아들을 깨웠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봇짐 속엔 쌀 한 톨 남아있지 않았다. 배고픈 것은 나중 일이다. 식솔들을 찾아야 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길을 나섰다. 큰 마을로 가면 무슨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물도 말라버린 개울을 따라 둑길을 걸었다. 군데군데 이른 봄볕에 성급하게 고개를 쳐든 싹들 외에 들판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햇살이 비추면서 뼛속까지 시리던 한기는 사라졌다.
"아부지, 저게 뭐지예?"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큰아들이 겁에 질린 듯 갑자기 멈춰 섰다. 개울 바닥부터 사람 키 높이만큼 높이 쌓여 있는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설핏 불어오는 바람결에 말로 못할 정도로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무엇인가 지독하게 썩는 냄새였다. '설마…. 아무리 세상이 흉흉해도 그럴 리는 업 것 제.' 갑수는 눈을 의심했다.
시쳇더미였다. 아래쪽에는 썩고 썩어서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웠고, 맨 위에는 온통 시커멓게 변하기는 했어도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대충 눈어림으로 짐작하기에도 100여 구는 넘어 보였다. 마치 거름더미 쌓아놓듯이 시체가 쌓여서 썩어가고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 큰아들은 연방 토악질을 해댔다. 신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그렁그렁 맺혔다.
◆피병소에 갇히다
세상이 망해가는 징조였다. 인륜은 개똥보다 못해졌고, 생명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라진 아내와 두 아이는 어찌 된 것일까? 그새 죽임을 당했는지, 병에 걸려 쓰러졌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시쳇더미를 멀찍이 두고 들판을 가로질러 산마루를 돌아섰다. 제법 큰 마을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었다.
머릿속에 하얗게 비었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마을 어귀에 닿기도 전에 갑수네를 맞은 것은 얼굴을 흰 천으로 가린 군졸들이었다. "게 서거라. 웬 놈들이여?" 가시 덩굴로 만든 임시방책 앞에 선 군졸들은 뭔가 겁에 질린 눈초리로 갑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소나무골에서 온 갑수라고 하는디요. 어젯밤 식솔들이 없어져 찾으러 나섰구먼요."
갑수네는 동네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창을 앞세운 군졸들의 지시대로 마을 왼쪽 산기슭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기설기 지어놓은 초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 입구에도 군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말도 없이 창끝으로 초막 쪽을 가리켰다. 영문도 모른 채 갑수네는 발길을 옮겼다. 초막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얼핏 봐도 스무 채는 넘었다.
초막 앞에 놓인 거적때기마다 사람들이 나자빠져 있었다. 움찔거리는 모양으로 봐서 숨은 붙어 있지만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이란 말인가? 불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봐선 먹을거리가 있는 듯했다. 초막들 가운데로 들어서자 장작불을 쬐는 무리가 둘러앉아 있었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일순 긴장했다가 금세 고개를 돌렸다.
무리 중 눈매가 유난히 매서운 한 사람이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고향을 묻고 이름을 묻고 여기까지 흘러든 연유를 물었다. "소나무골이라…. 보자 일전에 거기서 온 식구들이 있었을 텐데?" 장작불 건너편에 있던 이가 무심한 듯 답했다. "열흘쯤 전에 그 식구들 몽땅 죽었잖여. 이름이 뭐라더라…. 아! 아비 이름이 길영인가 뭔가 했는디, 맞나 몰라."
병든 자들을 격리시키는 곳, 바로 피병소였다. 거적때기조차 없어서 죽은 자들은 그저 들것에 실어 내다버리는 곳. 살리기 위해 마련한 곳이 아니라 따로 모아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곳. 뒤쪽엔 가파른 산기슭이고 앞쪽엔 창을 든 군졸들이 버티고 있는 곳. 죽어나갈 수는 있어도 살아서 제 걸음으로 나갈 수는 없는 곳. 죽음의 순서만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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