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중략)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도리'들보'서까래'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신영복의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우리네 삶도, 사랑도 역시 그러하리라. 그냥 스치듯 지나가버리는 꿈결의 그림이 아니라, 함께 사랑하고 살아가야할 사람들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2012)은 서로 엇갈리며 한참을 걸어왔다가, 서로서로 다시 한 번 마주 보는 '사랑학개론'이다. 평생 한곳에만 붙박여 있다가 새로운 일탈을 꿈꾸는 사내와 줄곧 떠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와 정착을 준비하던 여자가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진다. 떠남과 머무름이 다시 엇갈리는 동안에 건축가인 사내는 그녀가 살아갈 집을 지어주기로 한다.
지난 시절 마음 속으로만 밑도 끝도 없이 그려보다가 제풀에 허물어 버렸던 제각각의 집과 집. 이제는 지상에다 하나하나씩 쌓아가고 함께 어울려 집짓기를 시작한다. 옛 집터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지난날의 흔적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자라나는 키를 재 보노라 그어두었던 벽의 작은 선들이, 새 단장을 하노라 닦아놓은 시멘트 위에 무심코 남겨놓은 조그마한 발자국까지. 눈길을 주니 비로소 기억의 이편으로 건너온다. 서로 가슴 속에다 묻어두고 묵혀두었던 기억의 조각들도 그제야 맞추어 본다. 저 혼자 지레 들끓다가 문득 얼어붙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비로소 둘만의 따뜻한 추억으로 조금씩 되살아난다.
애당초 이룰 수 없었던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단지 이루어지지 않은 서로 엇갈린 사랑이었을 뿐이라는 확인 뒤의 뒤늦은 안타까움과 싸한 아픔들. 뜨겁고 비렸던 열기도 잦아든 날, 그렇게 되돌아오고, 또 그렇게 떠나간다.
"집이 질리는 게 어디 있어! 집은 그냥 집이지." 먼 길 떠나기 전날, 홀로 남겨질 엄마에게 평생을 묶여서 살아온 집이 질리지도 않느냐고 대들 듯이 물어오는 아들에게 건네는 엄마의 무덤덤한 대답이다. 그렇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단다. 저 혼자 꿈속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씩 살아가는 그만큼 살아가는 것이다.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마종기의 '성년의 비밀' 중에서) 묵은 딱지를 떼어낸 자리로 선홍색 피가 다시 흐르겠지만, 연한 새살이 돋고 이윽고 단단한 집이 지어질 거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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