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웃음기 줄어든 고3 딸에게

고3 엄마가 됐다. 지나가던 강아지만 봐도 깔깔대던 딸아이가 고3이 돼서 그런지 웃음이 줄었다. 나도 눈치 보느라 덩달아 피곤하다.

"엄마, 친구가 그러는데 아침에 깍두기 먹으라는 엄마 소리에도 짜증이 난대, 나도 학교 늦는다는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화가 나"라며 생글거린다.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받으니까, 알아서 이해하라는 소리다.

고3이 무슨 벼슬이냐고 말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고3 때 엄마를 말기암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의젓한 학생들의 사연도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참았다. 큰아이를 경험해봐서 아는데 고3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고3일 때는 어땠을까? 벌써 오래전 일이다. 분명히 힘이 들었을 텐데,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수능 A형이 어려운지 B형이 어려운지도 모르니, 정보력 많은 다른 엄마들과 비교해서 엄마가 아는 것이 뭐냐고 딸아이가 투덜거리면 할 말이 없다. 자기 아이가 공부하는 과목 중 어떤 것이 취약점이고, 가려고 하는 대학의 지난해 경쟁률은 얼마인지까지 꿰고 있는 학부형도 있기 때문이다. 주눅이 들어 있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한 술 더 뜬다.

"엄마가 그랬잖아.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런데 나는 내일이라는 대학 때문에 오늘을 끔찍하게 보내고 있어. 운동도 못 하고, 영화도 못 보고, 친구도 못 만나고."

나도 모르게 '콩' 머리를 쥐어박을 뻔했다. 하지만 잠자코 도시락만 쌌다. 괜히 성질 건드려서 싸우기도 싫었고, 그 핑계로 아침 안 먹고 갈까 봐 두려웠다. 빨리 학교 가면 좋으련만 또 간섭이다.

"엄마, 애들이 온갖 즙에 시달려. 배즙, 포도즙, 홍삼즙. 1교시 마치고 나면 저마다 즙을 먹거든." 그러고 보니 나도 머리에 좋다는 견과류와 두뇌에너지로 쓰이는 포도당이 풍부한 건포도 그리고 항산화작용이 풍부한 비타민C까지 딸아이 가방에 빼곡히 챙겨 넣고 있었다. 참, 엄마들이란. 한껏 예민해져 있는 고3 딸아이가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대학 입학을 위해서, 그리고 취업 준비와 미래를 위해서 소중한 오늘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청춘들. 당신들이 포기하는 것이 결코 오늘이 아니다. 한결같이 같은 속도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환자처럼 생각보다 일찍 인생의 마지막이 찾아와서 압축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시기도 있지만, 오늘을 통째로 내일에 바쳐야 하는 시절도 있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해석하면 된다. 고3은 어제의 연장선이 오늘인 것처럼 내일이 내일이 아닌 오늘의 연장선으로 느껴야 할 때라고.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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