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박근혜 정부 출범에 앞서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했던 여류 작가(이탈리아 거주) 시오노 나나미(76) 씨는 일본의 대표적 시사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 3월호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

"이탈리아의 몬티 내각은 1년 전만 해도 일본 국민들로부터 '이탈리아도 저 정도 할 수 있는데 왜 일본은 못해 내는가'라는 탄식이 나올 만큼 반짝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년 만에 상황은 역전되고 있다. 이탈리아가 학자, 관료 출신 내각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본 일본 국민들이 지난 총선에서 혼미로부터의 탈출을 자민당의 프로 정치가들에게 맡긴 것이다. 집권 초기 몬티 내각은 장관의 대부분을 교수 출신 학자나 고급 관료 출신들로 짰다. 경제인 1명만이 추가된 속칭 '테크티코 내각'(기술 전문가 내각)이었다. 그들의 아마추어 국가 경영의 결과는 절망적이라고 할 정도의 경제 불황이었다. 패착의 첫 단추는 증세(增稅)였다. 세무 당국조차 다 알 수 없을 정도였다는 포퓰리즘용 증세는 소득 감소로 바로 이어져 소비 위축을 초래했고 판매업과 중소기업의 경영 불황을 불러 실업이 늘어났다. 투자도 줄고 생산도 줄고 소비도 줄어드는 이탈리아 현상이 나온 것이다. 정치란 고도의 긴장감이 필요한 활동이며 정치가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사고들을 신경 쓰고 그것들이 가져오는 고도의 압박감을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가는 대학에서 학생들이나 가르치고 있으면 의무가 끝나는 학자형 인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녀의 논평은 오늘 막 출범한 박근혜 정부 내각의 인적 구성과 막대한 복지 공약 등을 살펴볼 때 타산지석의 느낌을 갖게 한다. 박 대통령의 개인적 신뢰나 역량에 대한 기대와 함께 뒷 모퉁이에 도사린 불안과 실망 또한 적지 않다는 말이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며,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부족했던 로마인이 한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은 테크티코들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원로원 제도와 공화정이라는 프로 정치집단의 정치력,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이 나면 원로원 귀족 계층이 서민보다 먼저 전쟁터에 나가 가문의 대를 끊어가며 목숨을 버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박 정부 경우 내각 후보자들의 면면이 공부 잘하는 학자, 고시 관료 출신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것은 몬티 내각의 불안 요소를 닮아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전문성과 경력을 내세웠다는 명분대로 앞으로 일만 잘해내면 될 일이다. 보다 근본적 취약점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몬티 내각 장관들의 로마시대 선조들은 전쟁이 났을 때 맨 앞에 나서서 목숨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하나로 그리스인의 지성, 켈트인의 체력, 카르타고의 경제 능력을 누를 수 있었다.

반면, 박 정부의 출범 팀에는 군 복무 기피 의혹이 예외 없이 불거지고 있다. 퇴직 후 로펌이나 금융기관, 무기 중개 회사 등에 취업해 억대 연봉을 받으며 후배들에게 로비스트의 압력이나 넣었다는 의혹도 오블리주(oblige) 부족의 불안을 보탠다. 자식들에게 수억대의 재산을 증여하면서 고작 몇십만 원의 증여세가 아까워 고위직을 누릴 땐 내내 감추고 있다가 감투 하나 주겠다니까 부랴부랴 제 발로 세무서를 찾아 지각 납세를 한 후보도 셋이나 된다.

후보로 지명되면 청문회 열리고 청문회 열리면 어떤 문제들이 추궁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탈세, 논문 표절, 병역 미필, 부동산 투기 등 자신의 허물과 죄는 누구보다 자신이 더 빤히 알 텐데도 폭로돼야만 숨긴 세금 내고, 의혹들은 구차한 뒷얘기나 통사정으로 넘어가 보겠다는 정신, 그런 풍조가 로마에는 없고 박 정부에는 있는 취약점인 것이다. 지도층이 불신과 위화감을 보여 놓고서는 국민 계층 간의 대탕평이 될 리가 없다. 국민 마음은 박탈감으로 갈라져 있는데 내각에 팔도 출신 섞어 넣는다고 대탕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박 정권이 성공된 정권이 되기를 바라는 충정에서 검증 후보자들에게 충고 드린다. 죄 없으면 모르되 허물을 알고 있으면 스스로 처신을 신속히 정리하라. 내 죄를 내가 모르겠다고 버티면 야당과의 기 싸움만 길어진다. 개인의 감투 미련으로 청문회도 덜 끝난 채 출범하는 박근혜호의 닻을 붙잡고 국민 대탕평을 깨는 것은 탈세, 부동산 투기보다 더 허물이 크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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