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저문다는 것, 서로의 색으로 스미는 것…색에 대한 단상①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류인서의 시 '어둠의 단애' 중에서)

저문다는 건 마땅히 자신의 모든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거라야 했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이젠 진실이다. 달려가도, 뿌리쳐도, 망각하려 해도 지워질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마땅히 서로의 색을 지우며 서로에게 스며야 함에도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색만 지키고 있다.

마구 뒤섞여 질서도 없는 아카시아 뿌리처럼 마음이 엉킨다. 행운목을 분갈이하면서 갑자기 마음이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이유도 없다. 여전히 바깥에서 걸려오는 여러 목소리가 모두 귀찮다. 지금 내 마음 어느 한쪽에도 타인을 배려할 만한 공간이 없다. 그냥 내가 숨쉬기도 벅차다. 내 숨이 벅찬데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햇살 고운 날에 오히려 역설처럼 내리꽂히는 어둠의 단애.

오랜만에 들른 고향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는 하얀 갈매기들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하얀 구름이 아련한 뒷배경으로 걸렸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가슴에 걸리는 응어리. 별것 아닌 풍경이 지나간 추억의 응어리들을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옹이처럼 내 영혼을 후볐다.

자꾸만 사람이 걸리고 삶이 걸리고 목이 걸려왔다. 자꾸만 울리는 전화기. 불현듯 살아간다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이라도 살아봤으면 하는 엉뚱한 마음의 움직임. 별다른 일도 없이 명절을 지낸 지금, 좀 답답하다.

내 고향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농촌 마을이다. 동쪽으로 솟아오른 세 개의 산을 넘어 그 꼭대기에 서면 파란 바다가 보였다. 난 바다를 보기 위해 자주 산에 올랐다. 내가 바라본 바다에는 섬이 없었다. 그냥 파랗게 이어지다가 하늘과 맞닿은 거기에 바다의 끝이 있었다. 바다의 끝은 하늘의 끝이기도 했다. 그게 내가 아는 바다의 전부였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섬은 단지 지리부도 책에나 존재하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해를 여행하게 되었다. 남해는 이미 내가 아는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 곳곳에는 아담한 봉우리들이 수없이 솟아 있었다. 그게 바로 섬이었다. 어릴 때 바라본 바다는 그냥 바다였는데 섬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의 바다는 이미 그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에는 섬이 있었다. 아니, 섬이 존재하기에 바다가 존재했다. 섬이 존재하기에 바다가 존재하는 엄연한 진리…. 결국 섬이 없으면 바다도 없다는 진리…. 대상의 부재는 존재의 부재를 낳는다는 걸 난 섬을 만난 이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진정한 화엄의 세계였다.

'나' 혼자는 언제나 힘들다. '나'가 '서로'가 되기 위해서는 '사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섬이 있어야 바다가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어둠이 있어야 밝음이 빛을 지닐 수 있는 것처럼 '나'를 넘어서지 못하면 삶은 무의미하다. '나'를 넘어서는 길은 하나이다. 조금씩 '나'의 색을 지워나가는 것. 그래서 '너'의 색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나'가 '너'로 변해 '나'와 '너'가 하나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이'를 확인하는 거기에 '나'를 넘어서는 길이 있다. '서로'는 '사이'를 확인하는 그 지점에 존재한다. '나'와 '너'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될 수 없는 그것이 오히려 행복이다. 아이들에게 향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에게 '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색을 지닌 그냥 '너'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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