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두 개의 자를 가졌다. 하나는 자신을 재는 자, 또 하나는 남을 재는 자다.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秋霜)와 같고 남을 대하는 데는 봄바람(春風)과 같이 하라는 성현의 말씀도 있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대개의 경우 자신을 재는 자는 느슨하지만 타인을 재는 자는 빈틈이 없다. 성현과는 정반대가 되기 십상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지만, 진정 아름다움을 지닌 자는 자기에게만 몰입하지 않는다. 내 안에 오직 '나'만으로 가득 채워진 자는 자기의 생각에 박수갈채를 해 주지 않는 자를 싫어한다.
얼마 전 가까이 지내는 문인 한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식사 중, 소주를 한잔 해도 되겠느냐고 술을 먹지 않는 목사 앞이라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흔쾌히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나는 밥을 먹었다. 대화는 대화대로 무르익고 또 서로의 것을 먹느라 여념이 없던 차, 그가 농 섞인 말로 한마디 건넨다.
"목사님, 왜 제가 먹을 안주를 목사님이 다 드세요?"
"선생님, 제게는 밥반찬입니다."
그리고 서로 웃었다.
한상에 올라온 같은 음식이라도 술 드시는 분에게는 안주요, 밥을 먹는 이에게는 찬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치료할 수 없는 '나' 중심적인 존재이기에 자기애를 지니고서는 결코 남이 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처방은 내 안에 '너'를 넣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홀로일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이는 그 생명을 있게 한 배후를 먼저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는 그 배후와 떼려야 뗄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혼자란 없다. 마틴 부버(Martin Buber)식으로 말하자면,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하나라도 나와 무관하게 버려진 '그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 밀접하게 관계 된 '너'인 것이다. 너 없이 나도 존재할 수 없다. 나든 너든 그것이든 모두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있어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를 사랑하면 나는 그가 되고 싶어진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따라서 남을 생각하고 나의 입장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 서는 것이 곧 최고의 사랑인 것이다. 나의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보라는 의미다.
기독교에서도 신(神)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의 방법을 택하셨다. 즉 신이 인간이 된 것이다. 사랑하기에 '내'가 '너'가 되는 것, 이것이 사랑의 극치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한답시고 한 번이라도 '너'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입장만 고수한다면 미래는 결코 행복을 손에 잡을 수 없다. 이제라도 우리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더불어 사는 모든 존재들을 향해 가슴을 열어야 한다.
어디 사람뿐이랴. 무슨 특별한 교감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슴을 열고 사랑하면 꽃의 언어, 새의 소리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열어놓은 창 안으로 내려앉은 햇살, 흩날리는 꽃잎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처마 밑에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방울의 속삭임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그에게는 술 한 잔이, 내게는 밥 한 술이 남았다. 술잔과 밥그릇 사이에 삼겹살 한 점이 식은 불판에 덩그러니 달라붙어서 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먼저 말한다.
"목사님, 제 안주 드세요."
"아니에요. 제 반찬 드세요."
아름다운 우리의 옛이야기 중에, 볏짚을 사이에 두고 형과 아우가 밤새 서로를 위해 단을 옮겼다는 눈물겨운 장면을 잘 알고 있다. 그 결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한 점의 노릿한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몇 차례나 '너' 앞에 그리고 '나' 앞에 옮겼다 놓았다 했다. 결국 그의 안주를 내가 먹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절정이었다.
이상렬/수필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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