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그러나 막상 고향을 등지고 나면 귀향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가 '서울로'를 외치는 요즘. 출가한 자식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늙은 노모 신세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고향을 외면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문태갑(84) 씨의 삶은 다르다.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벼슬이 끝나자 과감하게 '컴백 홈'했다. 1995년 고향인 대구 달성군 화원읍 인흥마을로 돌아와 줄곧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고향 집을 지키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책을 보존하고 찾아오는 후학들에게 인생 상담을 해주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선거철에만 고향을 기웃거리는 '서울 TK'에게는 귀감이다.
◆한 시도 대구를 잊은 적 없어
화원읍 화원교를 지나 5분 정도 달렸을까. 문태갑 씨가 살고 있는 인흥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구 도심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니 다소 놀랍다. 약속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이른 시간이다. 마을 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문 씨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인터뷰 전 마을의 역사와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인흥의 문씨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수봉정사가 취재진을 맞는다. 1936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건물 앞쪽에 마루를 설치하고 뒤쪽으로는 5칸의 방과 1칸의 누마루를 두었다. 앞마당 중앙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담장 가로는 매화나무가 빙 둘러 보초를 서고 있다. 늙은 회화나무를 에돌아 수봉정사 뒷길로 빠지면 광거당이 나타난다. 울처럼 두른 대숲에서 '쏴~' 바람이 인다. 다시 마을 앞 소나무 군락과 애잔한 신라 고탑….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고풍스러운 우리 멋이 잘 간직 된 곳. 그래서 어쩌면 문 씨의 귀향은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도시는 일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일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낙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요. 할 일을 다하고 돌아가는 것이니 귀향이라는 표현이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한 번 고향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았단다.
"서울에서 근 50년 가까이 살았지만 고향 대구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이리저리 얽혀 살며 서울을 버리고 대구로 오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고향에 대한 사랑과 애절함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고향을 지키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화려한 경력이 오히려 부끄러워
귀향 전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언론사 기자로 출발해 국회로 진출했다. 그 뒤 국무총리 비서실장,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올림픽추진본부장, 한국청소년연맹 총재를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올림픽추진본부장 시절에는 동분서주하며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현대 정치사에서 영남인맥의 대부로 기억된다. 동양통신에서 15년간 일하면서 정치부장, 편집부국장을 거쳐 1973년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79년에 서울신문사 감사로 돌아와 있다가 그해 말에 경북고 선배 신현확 총리에 의해 총리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78년에는 경북고 동창회 중 엘리트 그룹인 '경신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회장이 되기도 했다.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서울신문사 사장,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본부장을 지냈다. 1994년 마지막 공직인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지낸 뒤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누구나 부러워할 화려한 경력. 그는 자신의 경력을 오히려 못마땅해 했다.
"원래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대학 2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후 기자가 되고 정계'행정계에서 일했지만 모두 원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학자의 꿈을 접은 후 한 번도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단다. 요동치는 한국 현대사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자연스레 따라온 경력이었다.
1973년 유정회에 가입한 것은 지금도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유신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만 부끄럽지도 미흡하게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요. 유신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나 적대시하는 태도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수문고' 문지기
그는 하루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 주변을 아침저녁으로 돌아보며 골목과 담장, 기와 하나하나를 살핀다. 특히 이곳에 있는 '인수문고'의 문지기를 자처하고 있다. 2만 권 분량의 책이 소장된 인수문고는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아예 인수문고 옆에 '거경서사'라는 이름으로 방 2칸짜리 자그마한 독서실을 지어놓고 생활한다. 거경거사는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 방이라는 뜻.
하루 수십 명에 이르는 국내외 손님들을 맞는 것도 주요 일과다. 매일 평균 손님 10여 명에게 직접 차를 대접한다. 기자가 이날 얻어 마신 차가 6잔째란다. 지난 18년 동안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내 놓은 차만 해도 대략 2만여 잔 정도 된다고 한다. 차가 2만 잔이면 오간 이야기는 얼마나 많았겠는가.
인수문고 옆에는 1993년에 또 하나의 문고가 추가되었다. 그자 직접 설치한 '중곡문고'다. "인수문고의 정신 그대로 기초학문에 꼭 필요한 20세기 책들을 모았어요. 소장하고 있던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을 중심으로 5천 권이 보관돼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틈틈이 한국의 역사와 사회'경제 등에 관한 책을 수집하기 위해 인사동과 고서점과 학술회의 등에도 알뜰히 찾아다녔지요."
취재진의 부탁에 선뜻 중곡문고의 문을 열었다. 겨우내 쌓였던 찬기 운이 '휙' 빠져나갔다. 웬만한 도서관이 부럽지 않은 규모다. 한국사를 비롯해 각종 지리지, 유명인사 자서전, 백과사전류, 한국문학'예술'역사 연구서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즘 들어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자주 찾아오기도 하는데 인수문고나 중곡문고의 책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장기간 열람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는 거경거사도 이용할 수 있게 합니다."
◆마을에 매화나무 심기 나서
이 마을에는 지금도 많은 후손이 살고 있다. 서로 담벼락을 이웃하며 지내는 9채의 집주인들은 서로 '형님' 또는 '당숙'이라고 부르는 사이다. 거경거사 맞은 편에는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 살고 있다. 그의 사촌 동생이다.
"유년 시절만 해도 세거지에는 아들, 손자, 며느리 등 일가친척이 한 집에 모여 살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요. 아홉 집 모두 장남들이 물려받아 지금도 살고 있지만 은퇴하고 귀향한 예순 넘은 노부부들뿐입니다. 젊은 후손들은 모두 도시에 나가 있지요."
문 씨는 친척 간 유대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을 고심 중이라고 한다. 매월 첫째, 셋째 주에는 대구지역 친척들이 모임을 갖는다. 매년 5월이면 전국에 있는 친척들이 모두 모이고 음악회도 가진다.
몇 년 전부터 인흥마을 매화나무 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5천 그루 이상만 심으면 마을이 훌륭한 관광지가 된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500그루 정도 심었다.
인흥마을의 풍취에 취해서였을까. 인터뷰 시간이 3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고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건강 관리가 궁금했다. "특별히 따로 하는 운동은 없습니다. 일찍 귀향해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 건강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침, 이 날이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날이었다. 덕담도 잊지 않았다. "새 정부가 국민행복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한 셈이지요. 다만, 정부가 행복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행복해지고 국가가 융성해지지요."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msnet.co.kr
문태갑은?=1930년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했다. 동양통신 정치부장'편집부국장, 제9대 국회의원(1973), 국무총리 비서실장, 서울신문사 사장,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본부장, 한국청소년연맹 총재,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지냈다. 88올림픽 유치에 이바지했고 훈장을 받기도 했다. 서울신문사 사장 재직 때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기자 제도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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