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나! 의사입니다

어느 날 저녁, 점점 불러오는 아랫배를 어떻게 해 볼 심산으로 오랜만에 자전거를 끌고 신천강변에 나갔다. 얼마를 달렸을까. 저 멀리 잔디밭에 사람이 누워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다? 맞다! 이건 분명히 심폐소생술이다. 병원에선 자주 보는 장면이지만 이렇게 병원 밖에서 심폐소생술 장면을 맞닥뜨리기는 처음이다. 오래전, 의사가 되기 전 꿈꾸던 바로 그 장면! 비행기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하고 의사를 급하게 찾는다. 그러면 "나 의사입니다"하고 멋지게 환자를 구하는 그런 장면.(아마도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얼른 달려가서 환자의 눈도 뒤집어보고, 맥박도 만져보았다. 맥박도 강하고, 숨도 쉬고 있었다. 심장마사지를 하는 사람에게 "의사인데요, 환자 맥박이 뛰고 숨도 쉬는데요?"라고 했다. 그 사람은 살짝 당황하며 "아! 그러세요? 쓰러져서 숨을 못 쉬기에 일단 급한 마음에 심장마사지를 시작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오셨으니 다행이네요. 그럼 부탁합니다"하며 자리를 뜨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심장마사지는 하지 않고 환자에게 상태를 물어봤다. 환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다가 점점 호흡이 가빠지면서 손발이 저리더니 사지가 마비되고 결국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라고 했다.

이건 심장마비나 호흡마비가 아닌 전형적인 '과호흡증후군'(hyperventilation syndrome)이다. 갑자기 숨을 급하게 몰아쉬면 혈액이 중성에서 알칼리성으로 바뀌면서 손발 마비와 호흡곤란이 생기는 증상이다. 숨을 천천히 쉬고 내뱉은 자기 호흡을 다시 들이마시기만 해도 좋아지는, 인공호흡까지 할 필요가 없는 상황. 옷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숨을 천천히 쉬도록 유도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주위엔 어느새 구경꾼들이 빙 둘러쌌다. 그리고는 저마다 알고 있는 비방을 주문했다. 팔다리를 주물러라, 물을 먹여라, 바늘로 찔러서 손가락에 피를 내라 등등. 사람들에게 내가 의사임을 알리고 다소 진정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정도 호흡곤란과 손발마비가 좋아질 때쯤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환자는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떠나고, 나는 옷을 털고 일어나 쓰러진 자전거를 다시 타러 가려는데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근처에 있어서 살았다", "저 사람 정말 운이 좋았다".

그리곤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박수를 쳤다. 머쓱해진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황급히 자리를 떴다. 환자 한 명을 도왔다는 생각에 한껏 기분이 들떠서 예정보다 멀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 바람에 며칠 동안 다리가 후들거려서 모처럼 시작한 운동을 쉴 수밖에 없었지만.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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