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잠들기 전에

# 잠들기 전에 - 이시영(1949~)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 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꽁무니의 반딧불이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시집 『은빛 호각』(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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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고향에는 얼레가 있다. 연처럼, 떠나온 저마다와 고향은 연줄로 이어져 있다. 바람에 나부끼며 떠도는 동안에도 저마다의 가슴에 묶여 있는 연줄은 고향과 쉼 없이 내통하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저마다의 삶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돌아가고 싶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고향이다. 누가 얼레를 감아주랴.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파견한다. 고향은 영혼에 힘을 주는 충전소. 탯줄을 끊고 도망쳐 나온 육신이 어쩔 수 없이 영혼을 어머니의 품속으로 파견하는 것과 닮았다.

이 영혼은 반딧불을 밝히고 간다. 얼레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날아간다. 가서는 영혼조차 숨기고 숨어 운다. 스르르 잠이 들겠지. 아침이면 어디서 힘이 났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출근길을 서두를 것이다.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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