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온 소년 앞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들고 마중나온 엄마와 정답게 돌아가는 친구들과 달리, 소년에게는 마중나온 그 누구도 없다. 소년은 비가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소년 시절 기억은 지금까지 조각가 이상헌의 가슴속에 멍처럼 남아 있다.
"참 이상하죠? 살면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는데, 이렇게 아픈 기억이 제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니 말입니다."
갤러리M에서 열리고 있는 이상헌의 전시장 제일 안쪽에는 빈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무로 만든 정감 있는 이 작품 아래에는 톱밥이 깔려 있다. 빈 의자 앞에 다가가 보면 비로소 보인다. 톱밥으로 만든 그림자에는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 있다. 이것은 어릴 적 엄마를 기다리던 작가의 그림자이기도 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무'라는 어려운 재료를 고집하고 있는 조각가 이상헌은 '피에로, 의자, 말'이라는 소재로 작업하고 있다. 피에로의 가슴팍에는 서랍장이 있다. 그 서랍 안에는 작은 말 한 마리가 놓여 있다.
"기억은 서랍 같아요. 사람마다 누구나 서랍장 같은 기억을 갖고 있지요. 세월이 흐르면 잊히지만 살면서 불쑥 튀어나오곤 하죠."
행복하게 웃고 있는 말 조각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기억이 묻어 있다. 생애 처음으로 동촌유원지에서 아버지와 함께 탔던 목마. 평생 무뚝뚝했던 아버지와의 행복한 기억 덕분에 작품 속 말은 늘 웃고 있다.
작가는 '나무 조각'을 고집하고 있는 조각가가 여기에 있노라고 말하고 싶다. 은행나무를 1천~1천500번 사포질한 의자 조각에는 작가의 노동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이번 전시에는 높이 3m의 피에로 작품 '서랍장 속의 기억5'를 선보인다. 작가를 닮은 피에로의 가슴에는 책이 꽂혀 있고, 책 사이에는 낡은 편지 하나가 비죽 나와 있다. 언제 누구로부터 받은 편지였을까. 책 뒤쪽에는 첫사랑 소녀상이 아무도 몰래 놓여 있다. 가슴속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서정적으로 풀어놓았다. 작가의 노동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나무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스케일이 커졌다. "크기로부터 줄 수 있는 시각적 충격? 그런 걸 관객에게 주고 싶었어요. 다음에는 서 있는 6m 높이의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관절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에요."
작가는 큰 작품에 대한 매력에 푹 빠졌다. 나무 작업은 시간과 노동력이 많이 든다. 체력적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희열과 만족감이 크다.
'서랍장 속의 기억'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전시는 24일까지 열린다. 허기처럼 늘 그리운 작가의 빈 마음을 엿볼 수 있다. 053)740-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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