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 그때마다 이해 정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산을 찾는 경험도 비슷하다. 어떤 때는 사람마다 봄꽃이나 단풍 빛이 고와 산을 찾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녹음 짙은 계곡이나 눈빛을 좇아 산길에 들어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산은 달라진 풍경을 우리 앞에 드러내곤 한다. 나로선 코앞에 다가온 봄학기인지라 마음이 어수선하고 겨우내 보살피지 않은 건강도 후회되던 참에 가까운 산행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내연산 기슭 보경사 입구 도착이 두 시이고, 포항으로 돌아갈 여섯 시 차만 타면 산행을 위해선 넉넉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해탈문을 지나 곧바로 약수터에서 탁한 목을 씻은 다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나는 극락교 아래 쉬며 계곡에 얼굴을 씻고 시린 손을 말린다. 산길 따라 소녀 젖 망울 같은 순이 가지 끝에 돋아 있지만 아직 등산객의 자취는 드문 편이다. 개구리라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심심할 계곡 기슭, 살얼음의 단풍무늬도 곧 떨어지리라. 나는 바위 등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며 병풍 같은 산마루를 올려본다. 문득 저 병풍 아래 상처 입은 새처럼 울던 시절 내가 올랐던 한 등산로를 다시 오르고 싶어졌다.
이십 대가 끝나던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절벽 길 표지인 줄도 모르고 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산마루의 해가 정수리만 남겨두고 있을 무렵 도착한 곳은 한 암자의 뜰이었다. 당시 주인 없는 암자를 지키고 있던 그 처사의 표현대로라면 주지 스님도 가끔 세속 탁주가 그리우면 칠흑 같은 비탈길을 문제없이 내려가신다든가. 아무튼, 주인 없는 암자 뒷방에 스님처럼 축지법을 모르던 나는 지친 몸을 눕히고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밤새 내 죄의식처럼 칼바람이 멎지 않던 문풍지 사이 굿 장단 같은 북소리가 그치질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제, 스무 해가 흘러 다시 오른 이 암자 뜰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먼저 손님을 맞고 있다. 쓰다듬는 내 손가락 사이로 그 등에서 산바람 흙먼지만 풀풀 날린다. 복전함 뒤로 불상에 삼배를 올리고 나니 발치 아래 밭에 괭이질로 분주한 젊은 스님이 보인다. 멀찌감치 합장만 올리고 바로 발길을 돌리는 내게 이때까지 뒤를 따라오던 아들 녀석이 허무하단다.
어느덧, 하산길의 해탈문 그늘도 길어졌다. 아들 녀석이 암자에서 절을 할 때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해한다. 니가 잘 되길 빌었다고 하니 나도 녀석 소원이 궁금해진다. "저는 우주의 평화를 빌었어요!" 쏴, 내연산 등산길의 등 뒤로부터 폭포 소리가 연필 자국 같은 산풍경 아래까지 봄을 쏟아내고 있다.
장두현<시인·문학박사 oksanjang@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