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란한 '터치' 뽐내다 펜 드니 '악필' 괴로워

디지털 시대, 손 글씨는 살아있다

필기구가 많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라지만
필기구가 많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라지만 '악필' 고민은 여전하다. 대구 중구의 한 '악필 교정' 학원에서 수강생들이 글씨 바르게 쓰기를 익히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며 주로 IT제품을 남보다 먼저 써보는 소비자)를 자부하는 대학생 박원종(24) 씨. 그의 하루는 온통 '터치'로 가득하다. 통화와 문자는 물론 카카오톡'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터치한다.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볼 때는 화면이 큰 태블릿 PC를 터치한다.

수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 대학 강의실 풍경을 보면 노트북을 꺼내 워드 프로그램을 켜 놓고 자판을 두드려 수업내용을 정리하는 학생들이 적잖다. 심지어는 성능 좋은 스마트폰으로 수업 내용을 녹음하거나 촬영한다. 터치 한 두 번이면 된다. 리포트도 컴퓨터 문서 파일로 작성해 제출한다.

그래서 박 씨의 가방은 각종 IT제품과 액세서리로 가득하다. 대신 없어진 것이 있다. 연필'볼펜'지우개가 든 '필통'과 종이로 된 '노트'다.

◆'악필' 고민하는 현대인들

'첨단 대학생' 박 씨가 진땀을 빼는 때가 있다. 시험 칠 때다. "자판으로 기억한 수업 내용을 손 글씨로 논리정연하게 써 내려가려니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더욱 고민은 '삐뚤삐뚤'한 글씨체다. 채점할 때 혹시나 교수님이 못 알아보고 '감점'처리를 할까 봐서다. 실은 자신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있단다. 어릴 적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성인이 된 후 애들 낙서 같은 글씨가 콤플렉스가 됐단다. 그래서 손 글씨가 아닌 IT제품 터치에 목매는 까닭도 있다는 것.

박 씨의 사례는 조금 극단적인 경우다. 하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악필'로 고민하고 있다. 모든 것이 터치로만 가능할 것 같은 디지털 시대라지만 삶의 중요한 순간에 손 글씨가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달 4일 오후 대구 중구의 한 '악필 교정'학원. 대학생부터 주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이 '펜 글씨' 수업을 듣고 있었다. 교재에 쓰인 '제본을 정확하게 봅시다' '선생님께 교정을 꼭 받으세요'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수강생들이 쓴 검은색 글씨 위에는 교정 선생님의 빨간색 글씨가 덧씌워졌다.

이 학원 조장희 원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악필을 고치러 온다"고 했다. 그는 "자필로 답안을 길게 써 내려가야 하는 고시'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악필이 불합격으로 이어질까 봐서다. 주부도 적잖다. 친목 모임에서 총무를 맡더라도 회비내역 등을 쓸 때 자신이 없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더러 지방의회 의원이나 변호사도 온단다. 행사에 가서 방명록을 쓸 때 느끼는 부담감에 '울렁증'을 호소하며 지인들 몰래 학원을 찾는단다.

◆손 글씨,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갈까?

과거와 달리 초'중'고생 수강생은 줄었단다. "내신성적 관리와 입시 공부 때문에 바빠 자기 글씨에는 신경조차 못 쓰죠. 그러다 사회인이 돼 직장에서 부조금 봉투에 이름을 적거나 거래처에 보낼 연하장에 인사말 몇 자를 적을 때 쩔쩔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릴 적부터 글씨 잘 쓰는 법을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분명히 필요한 부분이지만 조 원장은 우리나라 교육 환경이 오히려 장벽이 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지역 일부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직접 저학년을 대상으로 경필 수업을 하거나 대회를 열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 습관을 잘 들이면 글씨가 금방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칠판 보고 베껴 적기 바빠져요. 양도 많은데다 '빨리빨리' 배워야 하죠. 그러다 보면 적정 수준을 넘는 '속기'에 글씨체가 금방 엉망이 돼 버립니다. 교육 환경에 조금 여유가 깃들 필요가 있습니다."

쫓기듯 쓰는 것만 아니라면 어린 시절 지속적인 손 글씨 쓰기는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손 글씨를 쓰는 것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보다 아동 뇌 발달에 훨씬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011년 6월 미국 인디애나대학 카린 할만 제임스 교수 등 연구진은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드릴 때와 뇌의 활성화 방식이 다르다"며 "손 글씨로 종이에 필기하거나 목록을 적으면 설령 그 종이를 잃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면 떠올리기 쉽다"고 밝혔다.

'천재는 악필'이라는 인식도 조금 수정할 소지가 있다. 자녀의 악필을 천재의 징후로 보는 부모들이 간혹 있기 때문. 레오나르도 다빈치'아인슈타인'에디슨 등은 역사 속 '악필가'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은 떠오르는 영감을 잊기 전에 기록하기 위해 펜을 휘갈겼을 뿐이란다. 예술가의 악필은 오히려 창작 활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음악가 베토벤은 짝사랑하던 '테레제'라는 여성을 그리며 음악 편지 형식의 곡을 작곡했다.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다. 학자들은 베토벤이 워낙 악필이었던 까닭에 당시 악보 인쇄소에서 제목을 잘못 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작가 톨스토이의 아내는 남편이 워낙 악필인 까닭에 남편의 원고를 '해독'해 출판사로 넘기는 임무를 맡아야 했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감성 채우는 손 글씨

손 글씨는 현대인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주기도 하지만 디지털 시대 속 모자란 아날로그 감성을 채워주는 강점을 내세우기도 한다. 요즘 기업'지자체의 브랜드 로고'광고, 책 표지, 영화 포스터 등에서 '캘리그라피'(calligraphy)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

캘리그라피는 '손으로 그린 그림 문자'라는 뜻이다. 활자를 기계적으로 새기는 것이 아닌 손 글씨 특유의 자연스러움과 개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전통 서예에 가벼움과 발랄함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붓글씨가 기본이지만 펜, 나뭇가지, 이쑤시개, 크레파스, 면봉, 칫솔 등 다양한 느낌을 내는 도구들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유명 캘리그라피 디자이너이기도 한 대구예술대 시각디자인학과 박병철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패스트푸드가 가득한 세상에 유일하게 인간의 감성을 회복시켜주는 대안이 캘리그라피에 담긴다"고 했다.

캘리그라피의 한 종류로 길거리 상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POP(피오피'Point Of Purchase) 광고 글씨도 오래전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POP 광고는 제품 판매 현장에서 소비자의 시선을 끌어 구매로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주로 예쁘고 앙증맞은 느낌의 글씨와 색감으로 꾸며진다. 제작이 쉬워 시즌에 따라 또 세일 등 각종 행사를 열 때마다 필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배우기 쉽다는 장점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주부들 사이에 배우기 열풍이 불었다. POP 광고를 만드는 부업은 물론 한국POP디자인협회가 인정하는 POP디자인기능사, 산업기사 등의 자격증을 취득해 강의 활동도 할 수 있다.

폼아트'초크아트'우드아트 등 기존 POP 광고 형식을 변형한 종목도 최근 소개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폼아트는 종이 대신 강화스티로폼 소재를 이용해 좀 더 내구성 좋은 POP 광고를 꾸미는 것이다. 초크아트는 오일파스텔을 이용해 블랙보드(칠판)에 그림과 문자를 그려 만드는 POP 광고다. 우드아트는 말 그대로 나무 소재로 나무 간판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POP 광고를 상업용뿐만 아니라 취미나 자녀와 함께하는 미술 교육 목적으로 배우는 경우도 늘고 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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